IT강국 꿈꾸는 베트남, 반도체를 새 성장동력으로

2024-05-03 13:00:03 게재

미·중 전략경쟁의 지정학적 요충지 최대 활용 … 세계적 반도체 기업 앞다퉈 투자

지난 4월 베트남 팜민찐 총리는 ‘더욱 효율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2030년까지 베트남 내에 첫 번째 ‘팹(Fab, 반도체 제조 시설)’을 설립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국영기업인 비엣텔이 주도할 전망이며, 제품개발에 성공한다면 베트남은 새로운 산업 자립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더하여 팜민찐 총리는 지난 3월 반도체 기업인 미국의 램리서치와 한국의 서진컴퍼니 대표단과의 회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환영하며 사업 지원을 위한 인센티브와 인프라 제공을 직접 약속했다. 응웬찌융 기획투자부 장관도 올해 2월 2045년까지 베트남이 글로벌 반도체 산업 공급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이같은 베트남 고위급의 말과 행동은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 육성에 대한 그들의 진정성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작년 초부터 다수의 베트남 학자나 관료들이 필자에게 한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 노하우에 물어오곤 했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베트남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의 성공사례를 따라 가려는 베트남 = 1인당 GDP 4000달러를 갓 넘긴 베트남이 반도체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경제사회발전전략 2045’를 통해 2045년까지 1인당 GDP 1만2천 달러의 고소득 선진국을 목표로 제시하면서, 베트남은 주변 동남아 국가처럼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것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해왔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단순 생산기지가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IT 관련 산업을 자국 내에 유치하고 자국 중소기업 육성을 통해 중진국 함정을 회피하고 동남아 IT 강국으로 자리메김하고 싶어 한다.

IT 산업 육성을 통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을 따라잡은 대표적 성공사례는 한국이다. IT 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기술수명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선진국을 따라잡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베트남도 우리가 걸었던 길을 따라 가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새로운 석유’로 불리는 반도체는 IT 산업 육성에 필수적이다. 특히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빠르게 재편되면서 안전적인 반도체 공급망의 확보는 더욱 중요해졌다.

미국, 중국, 일본, 인도, EU 등이 자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치는 이유이다. 즉 반도체 공급망의 내재화를 통해 특정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고 한다. 기존 비교우위에 따른 국제 분업체계의 약점이 두드러지면서 자국내 분업 체계로의 전환과 경쟁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재편 상황에서 베트남이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의 세가지 반도체산업 경쟁우위 = 먼저 반도체 산업의 입지로서 베트남은 다음 세 가지 경쟁우위를 가진다. 첫째, 베트남은 미·중 전략경쟁의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 베트남을 서로 포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3년 9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계기에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관계’의 최상위 수준으로 격상했다. 그해 12월 이미 최상위 양자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베트남을 방문하여, 양국 관계를 ‘운명공동체’로 묘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은 베트남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교두보로 인식하고 있고, 중국은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베트남을 삼은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중국을 대신할 저렴한 인건비에 기반한 새로운 반도체 산업 파트너가 필요한 미국 입장에서 동남아의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미국은 2023년 9월에 베트남과 반도체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차세대 반도체 공급망의 구성원으로 육성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특히 미국의 반도체과학법에 따라 조성된 ‘ITSI기금’을 활용해 베트남의 반도체 관련 역량을 지원하기로 했으며, 이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포괄적 이니셔티브도 합의했다.

둘째, 베트남은 삼성전자, LG전자 등 주요 IT 기업의 글로벌 생산기지로서 반도체의 대규모 수요처이다. 공급망의 단절을 경험한 글로벌 산업 생태계는 반도체를 포함한 전략 산업의 안정적 공급망의 확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 결과, 니어쇼어링을 통해 생산지 근방에서의 조달을 선호하고 있다. 중국이 부재한 상황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베트남과 동남아시아에 가치를 둔 것으로 이해된다. 2023년 2월 이코노미스트지도 알타시아(Altasia, Alternative Asia)라는 신조어를 통해 중국을 대신할 단일국가가 부재한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대만의 기술력, 싱가포르의 물류 및 금융허브 기능, 베트남을 위시한 기타 동남아 국가의 저렴한 노동력과 광물자원 등의 비교우위가 결합된 새로운 공급망 생태계의 형성을 강조한바 있다.

◆반도체 핵심 원료인 희토류 대거 매장 = 셋째, 베트남은 반도체의 핵심 원료인 희토류를 대거 매장하고 있다. 베트남이 전략적으로 희토류를 활용한다면 첨단기술 제품의 글로벌 공급망에 더욱 쉽게 통합될 수 있다. ‘미국 지리조사’에 따르면 베트남은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규모인 2200만 톤(전세계 매장량의 약 19%)의 희토류를 보유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2030년까지 200만 톤 이상의 희토류 광석을 개발 및 처리하고, 연간 최대 6만톤에 달하는 희토류 산화물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광물부문마스터플랜을 2023년 7월에 발표했다. 또한 베트남의 희토류 개발에 관해 한국, 미국, 일본, 호주도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은 2023년 6월 윤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계기에 ‘핵심광물 공급망센터’의 구축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미국도 그해 9월 바이든 대통령의 방문 계기에 희토류 자원에 대한 투자 유치에 도움을 주기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또한 일본도 2023년 11월 일본 경제산업상의 베트남 방문 계기에 반도체 제조와 인공지능 연구, 희토류 채굴 부문의 협력을 강조했고, 태스크포스(TF)를 설립하여 기술이전과 인적자원 개발 촉진의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베트남의 입지적 우위는 인텔, 삼성, 앰코, 퀄컴, 마벨 등 다양한 글로벌 전기 및 반도체 기업의 투자를 가져왔다. 대부분의 투자가 조립, 테스트, 패키징에 해당하는 후공정이지만, 점차 가치사슬을 확장해 나갈 전망이다.

예를 들어, 미국 반도체 설계회사인 마벨 테크놀로지는 2024년까지의 베트남 투자 의향을 밝히고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호찌민에 디자인센터를 건립 중이다. 또한 미국 반도체 기업 시놉시스는 중국에서 호찌민으로 엔지니어 교육센터를 이전하고, 집적회로 설계 및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양성할 계획이다. 또한 외국계 기업들의 반도체 부문에 대한 직접투자 증가는 베트남의 대미 수출을 크게 늘리는 성과를 가져왔다. 2018년 미국 반도체 수입에서 베트남의 비중은 2.5%였지만, 2022년에는 9.8%로 미국 전체 수입시장에서 5위를 차지했다.

◆안정적 인력공급과 전력부족 해소 과제 =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은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베트남은 세계 전자기기 수출국 상위 15위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반도체의 패키징 거점으로 이상적인 위치이다. 또한 한국, 일본, 중국의 주요 반도체 허브에 접근하는데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 육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한국, 미국, 일본,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베트남을 둘러싼 주요국 모두가 대규모 반도체 설비 증설을 계획하고 있으므로 핵심인재 확보와 안정적인 인력 공급은 과제이다. 베트남 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할 외국인 노동허가 발급 절차를 완화하고,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과 대학간 산학협력을 통해 반도체 인력 양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이다.

한편 2022년과 2023년 여름철 북부지역이 경험한 전력부족은 반도체 산업 육성에 치명적이므로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또한 법인세의 실효세율을 최저 15%로 하는 글로벌 최저한세를 2024년 1월부터 도입하면서 외국기업에 대한 조세우대가 어려워진 점도 베트남 정부가 풀어야할 과제이다.

한국은 베트남의 반도체 인력 양성 지원요청에 대응해 우리 반도체 산업 생태계와의 연계성 향상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기업의 수요에 부합하는 인력을 우선 양성할 수 있도록 지원 방안을 설계해야 한다. 또한 베트남과 동남아가 반도체 산업의 초창기인 만큼 관련 장비에 대한 수요가 확대될 전망이므로, 우리나라의 관련 기업이 진출하기 유리한 환경을 양자 협의를 통해 조성할 필요가 있다.

■ 주요국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

(미국) 반도체법에 기반해 미국내 반도체 제조를 확대하기 위해 총 740억 달러를 지원하고, 수출통제조치 및 반도체동맹, 반도체 공급망 선상의 주요국과의 협력 채널 강화 등 글로벌 연대를 강화하고 있음.

(중국) 2016년 첨단 반도체칩 제조를 위해 2026년까지 1500억 달러를 지출 계획을 수립하고 공급망 내재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일본) 86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칩 공장 신설을 통해 일부 칩 생산을 일본으로 이전하기 위한 대규모 산업 투자 프로그램을 개시함.

(EU) 2022년 2월 유럽 반도체법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점유율을 현재 10%에서 20%로 높이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총 430억 유로를 투자하기로 함.

(인도)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를 강조하며, 반도체 칩제조, 설계 및 패키징의 주요 허브가 되기 위해 총 3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하고 2021년 ‘인도 반도체 미션’을 출범함.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