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환동해 문명사

'실크로드'말고 '담비길''해삼길'도 있었다

2015-09-11 12:27:57 게재
주강현 지음 / 돌베개

애국가 첫머리가 '동해물과 백두산이…'인 것처럼 동해는 우리 민족에게 '마음의 고향'이요, '어머니 바다'이다. 때론 이상향이었다.

엄혹했던 1970년대 젊은이들은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를 목청껏 노래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이 동해를 '일본해'라 부르고 동해를 지키는 우리의 외딴 섬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우기는 짓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런데 동해는 과연 우리만의 바다일까.

해양문명사가인 지은이는 동해를 우리의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환(環)동해' 곧 동해를 두르고 있는 넓은 권역(圈域)으로 이해하라고 권한다. 그가 설정한 '환동해'는 물길로는 홋카이도·사할린해협 건너의 오호츠크해와, 캄차카반도 너머 아메리카 대륙과 연결되는 베링해에까지 이른다. 또 뭍으로는 한반도, 일본 열도, 시베리아 일대를 아우르고 내륙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만주와 몽골 초원까지를 포괄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은이는 국경이라는 인위적 경계와 국민국가의 제약을 뛰어넘어 유리시아의 '변경'인 환동해 영역에서 살아온 소수민족들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동해는 열린 바다, 열린 길이다

동해는 '열린 바다'이며 '열린 길'이다. 동해를 둘러싼 영역에서 숱하게 명멸한 국가와 (소수)민족은 고대로부터 바닷길을 따라 적극적으로 교통해 왔다.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한 '실크로드'가 동서 문화교류에 크게 이바지했듯이 환동해 권역에도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다양한 '길'이 존재했다. 그 하나가 '담비의 길'이다. 문명의 역사는 옷의 역사이기도 했다. 사냥의 산물인 모피가 단순히 추위를 피하는 의복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위신재(威信材)가 되면서 시베리아는 '황금의 땅'으로 떠올랐다. 모피 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검은 담비의 주산지였기 때문이다.

'대항해 시대'를 맞아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과 은을 대거 끌어모은 유럽사회는 모피로써 부를 과시했다. 그러자 러시아 상인들은 담비를 좇아 동으로, 동으로 이동한다.

결국 19세기에 시베리아에는 미국의 '골드러시' 못잖은 모피 열풍이 몰아친다. 러시아의 동해안 진출을 이끈 집단은 모피상인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동진 이전에도 '담비길'은 존재했다.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이 발해를 중계지 삼아 일본에까지 모피 무역을 한 것이다. 그 '길'은 지금의 카자흐스탄에서 시작해 알타이 산지~몽골 서부~헤이룽강을 거쳐 발해의 고토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발해에서 일본까지는 '일본도'라 부르는 뱃길로 이어졌다.

'해삼의 길' 역시 문명 교류의 살아 있는 장(場)이었다. 중국의 명청(明淸)시대에 말린 해삼은 교역의 주요 품목이었다.

조선은 조공 무역에서 해삼을 200근 보내야 했지만 사(私)무역에서는 그 규모가 훨씬 늘어났다. 압록강변의 시장인 중강개시에서만 해삼 2200근이 소요됐다. 당시 함경감사는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개시가 있는 고을의 해삼 관련 행정이 백성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된다."고 호소했다.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해삼을 전략상품 삼아 채취량 전부를 중국에 수출했다. 1744년 나가사키항 한 곳에서 선적한 해삼의 양만도 31만7430근(약 190t)에 달할 정도였다.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일대에서 해삼을 끌어모았고 심지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애보리진에게서도 해삼을 구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가리키는 한자 이름 '해삼위(海蔘威)'에는 '해삼길'의 흔적이 명확하게 남아 있다.

만들어진 신화 '미개한 아이누족'

환동해는 '열린 길'이자 고착된 삶의 터전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국가 단위의 문명 말고도 역사에 흔적이 남지 않은 종족이 무수히 생활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누족이다.

일본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은 흔히 '문명에 미치지 못한 야만인'쯤으로 치부된다. 그 사회의 발전단계가 '수렵채취' 수준에서 멈추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아이누족에게는 농업의 전통도 금속공예도 있었다. 와진(일본 본토인)들이 홋카이도를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농업과 금속공예의 기반을 상실한 것은 물론 어업과 수렵에서조차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을 따름이었다. 아이누의 땅엔 물고기가 많았다. "수면에서 헤엄치는 연어의 등은 볕에 그을린 판이었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연어들은 바위에 거의 긁힌 지경이었다." 그들은 연어와 송어를 먹을 만큼만 잡았다. 그러나 와진들이 몰려와서는 하구에 그물을 설치해 닥치는 대로 포획했다.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아이누족은 곤궁과 기아에 시달렸다.

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와진이 대규모로 이주했고 이듬해 그 땅은 홋카이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몇 년 후 '구토착민보호법'이 제정된 뒤로 아이누는 공식적으로 '와진에 동화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동해'도 '일본해'도 아닌 청해?

'환동해'는 영토·영해 개념이 아니다. '관계'와 '교류'로 이루어진 '액체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무대이다. 21세기 환동해에는 남북한과 일본, 러시아의 이해가 엇갈린다. 남북한과 일본 간에는 독도의 영유권과 바다 명칭을 둘러싼 갈등이, 일본·러시아 사이에는 '북방 4도서'에 대한영유권 분쟁이 한창이다.

지은이는 '동해'라는 이름이 역사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바다를 동해나 일본해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러 국가가 둘러싼 바다를 특정한 국명·방위에 따라 지칭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는 에메랄드 빛을 띈 바다의 특징을 살린 '청해(靑海)' 또는 지정학적으로 객관적인 '동북아시아해'로 부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환동해'라는 개념은 국내에서 처음 등장한 듯이 보인다. 그만큼 사고와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는 데서 이 저작은 큰 의미를 지닌다. 다만 73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도 쭉쭉 읽을 정도로 정리가 잘 되었는가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용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