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그루밍(길들이기) 피해자 심리 이해 못해"

2017-11-08 11:34:48 게재

피해자 길들여 신뢰관계 형성 후 성착취

외형상 '성관계 동의'로 보여 처벌 피해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서 주로 나타나는 '그루밍'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고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아동·청소년 보호단체인 사단법인 탁틴내일은 7일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속 그루밍(Grooming·길들이기),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7일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 누리홀에서 사단법인 탁틴내일이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대응책을 모색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 탁틴내일 제공


'그루밍'이란 성적 유혹의 의도를 갖고 피해자에게 접근해 신뢰관계를 쌓은 뒤 피해자가 성적 가해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길들이는 행위다. 이 경우 성폭력 행위가 수월해지고 범죄의 폭로를 막는 효과가 생긴다.

그루밍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가해자들은 아이들의 취미나 관심사, 외로움이나 빈곤같은 취약점을 파악해 피해자를 고른다. 이후 선물을 주거나 게임 등의 취미를 공유하면서 친분을 쌓은 후 서로 비밀을 만들며 가해자에 대한 의존성을 키운다. 이후 관계를 성적으로 만드는 단계로 넘어가는데 신체 사진을 주고받거나 성적인 대화를 나누고 포르노를 보여주며 학습시킨다. 이후에는 ‘안마하는 거야’ ‘너를 사랑하는 거야’ 등의 말을 하며 피해자를 속여 성적 관계를 맺은 후 피해자가 빠져나가려 하면 통제를 강화하거나 협박하며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이같은 그루밍 성범죄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성범죄 의도’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관계맺기와 구분하기 어려워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김미랑 탁틴내일연구소장은 "가해자가 성적인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행동은 보통 사람들의 행동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구분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 “특히 사람은 누구나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는다고 믿게 된 아동은 가해자의 그루밍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오히려 피해자의 가족들까지 가해자에게 길들여져 가해자를 아이를 챙겨주는 좋은 이웃이나 어른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루밍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거의 없는 상태지만 현실에서 그루밍 성범죄는 심각한 수준이다. 탁틴내일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올해 6월까지 접수된 성폭력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 전체 78건 가운데 그루밍에 의한 성폭력 사례가 34건(43.6%)을 차지했다.

수사기관과 법원도 그루밍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다. 그루밍을 당한 피해 아동.청소년이 성관계에 합의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동청소년과 성인간의 성범죄를 다룰 때 ‘서로 사랑한 사이였다’는 가해자의 변명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2013년 15세 여중생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사례가 대표적이다. 1·2심에선 각각 징역 12년형, 9년형이 선고됐지만 대법원은 연예기획사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피해 여중생이 평소 대표에게 보낸 메시지에 드러난 친밀한 표현에 대해 ‘피해자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또 피해자가 겁을 먹었다면 왜 계속 만남을 유지했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도 했다.

김재련 변호사(법무법인 온세상)는 “외국 판례에서는 피해아동이 느끼는 주관적 공포를 이해하는 등 피해아동의 관점을 유지하는데 반해 대법원은 (연예기획사 대표 사건에서) 피해자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았다”면서 “합리적 이성을 가진 법관 관점에서 사건을 들여다봤을 뿐 피해자의 주관적 두려움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 사건은 검찰의 재상고로 다시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외형적으로 동의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행동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피해자로 길들여지는 과정이 있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에서는 성적 동의연령을 만 18세 이상으로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만 13세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면서 “성적 동의 연령 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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