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의 재발견-범죄의 시작과 끝 '지문'
살점 남아있다면 백골까지 신원파악
2011-08-25 11:26:07 게재
감식기술 개선 신원확인율 65%로 높아져 … '쪽지문'만으로 9년전 살인범 검거
지문자동검색기를 통해 용의자의 지문을 분석했지만 지문의 일부만 확인된 이른바 '쪽지문'이어서 융선(지문선)을 특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확보된 지문과 모발은 보관창고로 보내졌고 사건은 미제상태로 방치된 채 9년이 흘렀다. 경찰청이 추진한 지문자동검색기 고도화 사업이 2009년 말 마무리되면서 자칫 영구미제가 될 뻔 했던 이 사건은 '햇빛'을 보게 됐다. 쪽지문도 인식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된 덕분이었다.
지문을 확보한 미제사건에 대해 전면적인 재수사가 진행됐다. 2010년 1월 드디어 모발과 쪽지문 분석을 통해 용의자 이씨의 인적사항이 확인됐다. 여기에 이씨가 버린 담배꽁초와 쪽지문·모발 DNA 대조작업을 통해 이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범행을 완강히 거부하던 이씨도 유전자 확인 결과와 범행 현장에서 확보한 정황 증거를 들이대자 결국 모든 범행사실을 실토했다.
#2010년 10월말 서울 강동구 강일동 야산에서 백골 시신이 발견됐다. 특이하게도 모든 신체부위가 부패해 뼈만 남은 시신에서 유독 두 손은 썩지 않고 미라 상태로 온전히 보존돼 있었다.
경찰은 즉시 양손에서 지문을 채취해 분석에 나섰고 유골 주인공이 5년 전 가출 신고된 김 모씨(여ㆍ당시 49)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은 김씨가 집 안에서 흔히 입는 복장을 한 채 숨졌고 시신이 동거남과 함께 살며 쓰던 오리털 이불로 둘러싸인 점을 토대로 동거남 심 모씨(42)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벌여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심씨는 2005년 5월 10일 오후 11시쯤 강동구 천호동 지하 셋방에서 함께살던 김씨와 도박 문제로 다투다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이불로 감싸 야산에 몰래 묻은 것으로 경찰수사결과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김씨 딸에게서 김씨 가출신고를 받았지만 김씨 행방이 묘연한 데다 시체도 발견되지 않아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달 말 산책로 조성 공사 도중 유골이 발견되고 지문감식으로 신원이 확인되면서 미제로 남을 사건은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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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특히 범죄현장에 남아 있는 지문은 사건 해결의 시작점이자 종결점이다.
수년간 미제로 남아있던 사건 해결의 숨은 공신으로 지문을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경찰청이 지난 2009년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의 알고리즘은 미제로 남아있던 사건해결에 전환점을 제시했다.
이 지문인식 알고리즘은 유류지문 특징점 편집기능을 통해 불완전한 유류지문을 자동 복원해 신원확인의 정확도를 높인 기술. 여기에 지난 2007년부터 '과학수사 지문 DB 및 공유서비스체계 구축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다. 기존 AFIS에 구축된 저품질의 지문 DB를 개선하고 지문 DB 관리를 체계화했던 것. 지난 2007년 1400만명의 지문 DB 구축을 1차로 완료했고 2009년까지 4000만명의 지문 DB를 개선했다. 그 결과 수년간 미제로 남은 사건을 해결하는 데 많은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실제 2001년 전국의 경찰이 경찰청에 지문감식을 의뢰한 사건은 모두 2만3366건. 그러나 이 가운데 신원을 확인한 사건은 4178건에 불과했다.
신원확인율은 20%도 안됐다. 그러나 지문감식 기술이 고도화 된 지난 2009년엔 신원확인율은 54%로 늘었다. 또 지난해의 경우 지문감식을 의뢰 받은 2만608건 가운데 1만3436건(65%)의 신원을 확인했다. 9년새 신원확인율이 3배 이상 급증한 셈이다.
여기에 과학수사 경찰관들의 개인적인 기술까지 더해져 지문감식 기술은 갈수록 개선되고 있다.
박희찬 전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경위의 경우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고온습열처리법, 표피절단법, 접착테이프 채취법' 등 지문채취기법을 개발했다. 10여년전만 해도 물에 빠져 숨진 시체의 신원을 파악할수 있는 비율은 20%에 불과했지만 박 팀장의 고온습열처리기법 개발로 80%까지 높아졌다. 이젠 훼손이 심한 시신이라도 살점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면 신원을 알아낼수 있을 정도다. 경찰은 실제 6년전 백골의 신원을 특정하지 못해 미제로 미뤄두었던 살인사건의 전모를 새깨손가락 지문만으로 밝혀냈다.
지난 2005년 10월 전북 전주시의 길가에 세워진 택시 안에서 A씨(당시 35·여)가 숨진 채 발견됐다. 택시는 반쯤 불에 탄 상태였고 경찰은 운전사 임 모(당시 39)씨를 용의자로 특정해 수배했지만 행적을 찾지 못했다. 2006년 3월 전북 완주군의 한 시골마을에서 4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백골 상태로 발견됐다.
경찰은 택시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보고 왼쪽 새끼손가락에서 지문을 채취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신원확인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경찰이 올초 과학수사센터 AFIS를 통해 백골의 신원을 확인할 결과 이 남자가 살인 피의자로 수배됐던 택시기사 임씨로 판명됐다. 경찰은 임씨가 A씨를 살해한 뒤 택시를 불태우고 달아났다가 수사망이 좁혀오자 사건 현장으로부터 16㎞가량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다.
또 지난 2월 서울 여의도백화점 물류창고에서 발견된 11억원의 택배박스 주인이 불법 인터넷도박사이트 운영자라는 것도 지문을 통해 밝혀냈다.
경찰은 박스에 남아있던 지문과 백화점 내부 CC(폐쇄회로)TV 기록을 통해 돈의 주인을 특정했고 11억원은 인터넷도박 사이트를 운영해 벌어들인 돈이라는 사실을 자백받았다. 첨단 지문감식 기술이 없었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풀기 어려운 사건들이었다.
고병수 기자 byng8@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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