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노포 영상에 담고 공동체시설 정책제안하고
직장인동아리도 주민모임도 '서울 연구자'
서울연구원 '작은연구' 8년간 207개 지원
7일까지 '갈등없는 서울' 주제로 사업공모
"신랑하고 직장 다니다가 만났거든요. 시어머니께서 이걸 하고 계셨어요. 직장 다니는 것보다 이걸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벌써 30년 전이죠. 어머니께서 하신 것까지 45년." "여기 들어온 게 1995년 6월. 뭘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생각하다가 배워놓은 기술이 있어서 한복을 해야겠구나. 이야~ 진즉 할 걸 싶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어요 … 가게 하나 만들어서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때까지 무료강습을 하고 싶어요."
30년 40년 역사를 가진 전통시장 내 오랜 점포 이야기가 영상으로 기록됐다. 복고 열풍이 부는 가운데 독서 토론으로 연을 맺은 젊은 직장인들이 연구모임을 꾸려 노포(老鋪)에 눈길을 돌린 참이다. 서울연구원에서 시민들이 직접 생활에 필요한 연구를 발굴, 현장 이야기를 담도록 지원하는 '작은연구 좋은서울' 결과물이다.
1일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 지원한 '작은연구 좋은서울' 사업에 참여한 12개 연구 결과물이 나왔다. 연구원은 지난 2012년부터 공개모집을 통해 연간 두차례 시민 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제시한 개인이나 모임을 선정, 300만원에서 800만원까지 비용을 지원한다. 연구원 전문가 도움을 받아 6개월간 자유롭게 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을 보고서나 정책제안집 동영상 등으로 제출하는 형태다. 8년동안 시민들이 진행한 연구만 총 207개에 달한다. 서왕진 서울연구원장은 "정책 생산과정에서 시민이 얼마나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지, 얼마나 호응하는지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며 "작은연구 좋은서울은 그같은 취지에서 운영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유휴공간을 활용하여 우리동네 활력 불어넣기'를 주제로 한 올해 상반기 연구에는 기획 과제 2개, 자유 과제 7개, 연구모임 3개가 선정됐다. 연구과제는 개인이나 단체, 연구모임은 5명 이상 모둠이 대상이다. 직장인들이 모인 독서동아리부터 대학·대학원생, 공동체시설을 운영하는 주민들까지 다양한 구성원들이 '시민 연구자'로 변신했다.
전통시장 내 '맛집'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는 오랜 점포에 주목한 건 책을 매개로 뭉친 젊은 직장인들 '노포기록 프로젝트팀'이다. 정소영 팀원은 "일본이나 대만 등 외국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점포들이 많고 사회적으로 주목도 받는데 우리는 그런 문화가 없다"며 "사회적관계망을 통해 연구 제안을 하고 구성원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이현서·임동우·정지나씨 등이 그렇게 뭉쳤다.
2017년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200년 이상 된 장수기업은 5586개. 가까운 일본에만 3113개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200년 된 노포는 없고 100년 이상 된 곳은 80개가 있다. 젊은 연구자들은 강남권 영동시장, 국내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종로구 광장시장, 20·30대에 인기 있는 성동구 뚝도시장 가운데 25년 이상 된 가게,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오래 유지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곳을 택했다.
"쉽지는 않았어요. 영상에는 호의적인 분들이 담겼지만 만남 자체를 원치 않는 분들도 많았어요."
서로 다른 직장에서 근무하는 만큼 각자 일을 끝내고 역할을 나눠 시장을 찾고 상인들을 만났다. 적게는 2번부터 많게는 7번까지 방문, 상인들 이야기를 듣고 영상을 찍고 편집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점포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어떤 정책이 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될지를 기록했다. 그렇게 6개월. 작은연구는 끝났지만 청년들의 연구는 계속된다. 이현서 팀원은 "오래된 신문기사를 오려서 간직하고 있는 분을 보니 가게마다 이야기를 담은 책자를 제작해서 선물을 드리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지나 팀원은 "서울연구원에서 하반기에 '갈등없는 서울'을 주제로 연구사업을 공모하는데 전통시장과 오랜 점포도 그 영역에 속하는 것 같다"며 "바로 연구를 이어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선정되지 않는다 해도 문제는 없단다. 청년들은 "재미 없어질 때까지 자비를 들여서라도 계속 연구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을 비롯해 '청년은 왜 공동체를 누리지 못하는가' '노숙인(홈리스) 청소년 경로분석을 통한 정책제안' '고가 하부 유휴공간의 활성화에 미치는 요인 분석' 등 일상에서 출발한 12개 연구가 결실을 맺었다. 시민 연구자들은 유학생 밀집 지역인 서대문구에서 벼룩시장 겸 소통의 장을 만들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경험을 하거나 강한 햇볕과 비를 피하며 휴식을 취하곤 하는 고가 하부 12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사를 했다. 공동체공간이 필요하다거나 고가 하부 공간에 이름을 붙이고 의자나 조명 운동기구 등 시설물을 설치하고 관리한다면 시민들이 더 유용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정책제안이 그 과정에서 나왔다.
서울시 마을공동체 공간 지원사업으로 조성된 강서구 화곡본동 '공간 짬' 5년 성과를 평가해 사업 내실화 방안을 연구한 김숙희 운영자는 "연구를 통해 5년 성과가 선명하게 정리된 느낌"이라며 "비슷한 상황에 있는 시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자료로 쓰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행정에서도 기존에 지원한 공동체공간 가치를 깨닫고 효과적으로 활용했으면 한다"며 "지원을 넘어 시민사회와 협력, 개인 삶의 질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서울연구원은 상반기에 이어 오는 7일까지 하반기 사업공모를 한다. 서울시 행정에 관심 있는 시민 누구나 연구원 누리집을 통해 접수·참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