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재벌중심 한국 경제구조 바꿀까

2020-04-09 14:26:20 게재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스페셜리포트

전자상거래 기업이자 한국에서 가장 값나가는 스타트업인 쿠팡은 서울 송파구 잠실의 한 마천루 상부 20개층을 쓴다. 건물 아래 층엔 현대 계열사들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는 한국 2위 기업이다. 이 건물도 현대 계열사가 건설했고 운영중이다. 쿠팡 직원들끼리 하는 우스갯말이 있다고 한다. 출근 시간 만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사람은 십중팔구 현대 직원이라는 것. 이 건물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스타트업 직원들은 청바지에 운동화를 착용한다. 반면 현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양복을 입고 출근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 스페셜리포트에서 한국의 경제구조와 스타트업 생태계를 다뤄 눈길을 끌었다. 이 매체는 "한국 정부는 쿠팡과 같은 스타트업들이 단지 근무복장만이 아니라 재벌 중심 경제구조를 바꾸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2013년 전임 박근혜정부는 '창조경제'를 내세우며 창업자를 위한 종잣돈과 스타트업 육성(인큐베이터), 네트워킹 구축 등에 예산을 책정했다. 지난해 문재인정부는 2022년까지 추가로 12조원(99억달러)의 벤처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재벌에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은행 등 금융권에도 스타트업 육성에 힘을 보탤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 재벌기업도 끌어들이고 있다.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기업은 자체적으로 스타트업을 키우기 위해 돈을 투자하고 있다. 정부는 또 중소기업들이 돈을 빌리기 쉽도록 은행 대출의 상당부분을 보증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출금리 차이가 가장 적은 나라 중 한 곳이다.

이런 상황의 배경엔 경제성장의 장기적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긴급성이 있다. 한국은 수출주도 모델을 내세워 거대 재벌기업과 국가육성 제조업을 우선시하면서 부유한 나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수출 성장세와 전반적인 국내총생산(GDP)이 지난 10년 동안 OECD 평균을 향해 낮아지고 있다. 국민 1인당 소득은 여전히 OECD 상위 절반 국가들보다 1/3 낮은 상황이다. 국가경제의 60%를 차지하는 서비스업의 생산성은 제조업의 절반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은 대기업보다 생산성이 크게 낮다. 이를 고치려면 경제구조 대변화가 절실하다.

OECD 30년 재직기간 중 26년을 한국경제담당관으로 근무하다 지난해 은퇴한 랜들 존스는 이코노미스트지에 "재벌 중심 경제성장 모델은 끝났다"며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면 스타트업 중심의 디지털 경제 모델로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컬럼비아대에서 한국경제를 연구중이다.

경제구조 전환이 장기적 과제라면, 현재 한국이 직면한 문제는 보다 직접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확산)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경제를 뒤집어놓고 있다. 현재의 글로벌 격변은 국제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에 매우 큰 고민거리를 던진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는 이코노미스트지에 "충격이 얼마나 클 것인지는 코로나19 국면이 얼마나 오래 지속하느냐, 정부가 경제충격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큰 파장이 일어날 전망이다.

코로나19 단기 충격은 이미 한국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지난달 한국 증시와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2009년 이래 최악으로 하락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등 항공사들은 3월 두 번째 주 기준 승객이 전년 동기 대비 92% 줄었다. 전 세계 각국의 여행 금지·제한 조치를 고려하면 조만간 회복을 기대하긴 어렵다. 소비심리도 급락했다. 상점과 식당 등은 올 1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80% 급감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많은 업장이 이미 월세 내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반면 쿠팡과 같은 전자상거래 기업들은 수요 폭증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주문이 전년 동기 대비 50% 가까이 상승했다.

코로나19 이후 공장을 폐쇄한 중국은 1~2월 산업생산량이 20% 이상 줄었다. 이는 중국산 부품에 의존하는 한국 기업에 파급효과를 준다. 한국 자동차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현대자동차의 2월 글로벌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3% 하락했다. 중국 부품 공급업체가 문을 닫는 바람에 약 12만대의 차량 생산이 차질을 빚었다. 상황은 더 악화될 조짐이다. 중국 이외의 나라들도 공장을 폐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국의 코로나19 상황이 전정되면서 생산이 재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급망 차질, 코로나19 확산 등은 반도체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패널 등을 제조하는 기업을 타격하고 있다. 삼성과 LG 공장 등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서 수차례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양사의 공장들은 24시간 풀가동을 전제로 1년 계획을 짜기 때문에 올해 내내 생산과 판매량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장기적 상황은 어떨까. 상당 부분은 한국과 전 세계 각국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는지에 달렸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여러 번의 경제위기에서 재빨리 탈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은 2년 만에 위기 이전 GDP를 회복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다른 나라들보다 회복이 빨랐다. 은행부문이 10년 전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건전했고, 정부가 재정·통화정책을 동원해 공세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코로나19 역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정부는 11조7000억원의 부양책을 꺼내들었다. 중소기업 지원과 채권·주식시장 안정에 100조원을 동원할 방침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슷하다. 박상인 교수는 "이런 조치가 효과를 낸다면,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충격은 일시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OECD 크리스토프 앙드레는 "기초체력이 좋고 부양책에 자금을 댈 재정력이 크기 때문에 한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침체에서 빨리 회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의 반 글로벌화 흐름을 강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럴 경우 수출 주도 성장모델을 가진 한국에 장기적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코로나19 위기를 헤쳐나가는 한국은 고질적인 장기과제에 직면해 있다. 인구노령화 속도가 무척 빠르다. 생산가능인구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정부는 총인구가 이미 정점에 달했을 수 있다고 추산한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65세 이상 인구의 상대적 빈곤율(중위소득의 절반 이하)이 44%로 가장 높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일본의 경우 노인빈곤율은 20% 이하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국민연금 자산은 30년 이내 고갈될 수 있다. 많은 기업들이 50대 중반의 노동자들에게 은퇴를 종용하는 것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현재의 복지 수준을 확대하거나 또는 유지하기 위해선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거 수십년과는 다르게 재벌에 의존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수출은 여전히 GDP의 2/5를 차지하고 반도체와 자동차, 스마트폰 등 수출 중심 품목들은 재벌이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 품목들은 중국과의 경쟁에 취약하다. 그리고 코로나19 진정 이후 전 세계가 글로벌화에 등을 돌려 새로운 무역장벽을 세운다면 더더욱 위태로워진다. 지난해 수출은 전년 대비 10% 이상 줄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여성인재를 적극 활용하는 동시에 고용의 90% 가까이를 책임지는 중소기업의 생산성을 장기적으로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스타트업 경제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의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스타트업 관련 발전속도도 신속하다. 쿠팡이 설립된 2010년, 한국에선 스타트업 생태계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약 80개의 스타트업이 투자자들로부터 100만달러 이상을 모았다. 현재 약 700개의 스타트업이 있다. 그중에는 1000만달러 이상을 투자받은 200개 스타트업, 가치가 10억달러를 넘는 유니콘 기업이 10곳 있다. 쿠팡의 경우 90억달러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19년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국 스타트업에 4조원(33억달러) 가량 벤처자금을 쏟아부었다. 2013년 대비 3배 늘었다.

스타트업 생태계의 급속한 발전은 서울을 변모시키고 있다. 쿠팡의 본사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남구 테헤란로에는 스타트업과 벤처들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공간, 값비싼 커피숍이 즐비하다. 이곳 전역엔 소규모 벤처클러스터가 뻗어가고 있다. 벤처캐피털 TBT의 임정욱 대표는 이코노미스트지에 "2013년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 규모는 매우 작았다"며 "이젠 점심을 먹으러 가면 늘 벤처창업자들과 마주치곤 한다"고 말했다. 한국 벤처캐피털연합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벤처캐피털 투자액은 GDP 대비 0.36%였다. 중국의 0.26%보다 높았지만 미국 0.64%, 이스라엘 1.75%보다는 적었다.

자기사업을 시작하는 건 점차 재벌기업의 직원 또는 공무원이 되는 것의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컨설팅기업 G3파트너스의 네이선 밀러드는 "10년 전만 해도 한국 엄마들은 자식이 스타트업을 한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들고 말렸다"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돈을 많이 버는 창업가들의 사례가 속속 등장하는 게 한 이유가 됐다는 분석이다.

쿠팡 창업자 김범석 대표는 2018년 억만장자(소득 1조원 이상)에 올랐다. BTS를 키워낸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방시혁 씨는 약 8억달러 가까운 자산을 갖고 있다. 그같은 성공사례는 수십년 동안 거대기업의 계층사다리에 묶여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창의적 사업을 꾸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긍정적 자극제가 되고 있다.

한국의 스타트업들이 경제성장 동력으로서 재벌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갈길이 멀다.

한국경제에서 스타트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적다. 2019년 벤처산업에 유입된 투자금은 같은 해 실적악화를 겪은 삼성전자 이익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스타트업들이 경제성장을 견인하기 위해 꼭 재벌을 대체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OECD 전 담당관 랜들 존스는 "혁신과 디지털 경제를 대하는 스타트업들의 자세가 전통적인 서비스업 부문에 확산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그래야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미시적 규모에서 그같은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서울 동대문의류타운 출신 여성 2명이 운영하는 스타트업 '패브릭타임'은 온라인영상 플랫폼을 활용해 동대문에서 생산하는 의류직물을 전 세계 디자이너들에게 홍보한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동대문시장 의류도매상들은 이제 과거와 비슷한 마케팅 예산으로 글로벌 시장까지 노리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한국의 스타트업 성장세를 둔화시킬 수 있다. 과거 경험에서 보면 경제위기는 늘 인수합병을 촉발했다. 위기 때엔 현금을 쌓아놓은 재벌 등 거대기업들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다행히 장기 침체를 피한다고 해도, 기존의 재벌중심 수출중심 경제구조는 더 고착화될 수 있다"며 "경제구조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한국으로선 커다란 도전과제를 맞았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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