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재판에 줄행랑치는 수입차 CEO들
닛산·폭스바겐 이어 벤츠까지 … 사실상 본사 차원의 수사방해
수사와 재판을 앞둔 수입차업계 외국인 CEO들의 줄행랑이 반복되고 있다. 기준 미달 제품을 한국에 수입한 뒤 소비자들에게 팔아 이윤을 챙겼지만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한국의 형사·사법 체계가 무력화되고 있는 것이다.
20일 법조계와 수입차업계에 따르면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사장이 출장 중 귀국하지 않은 채 9월 1일 캐나다 법인 CEO로 부임키로 했다.
실라키스 사장은 지난 5월 환경부가 벤츠코리아의 배출가스 프로그램 조작사실 발표 계획을 세우자 출국해 지금까지도 귀국하지 않고 있다.
◆환경부 고발과 동시에 출국 = 환경부는 2년여간 벤츠코리아 등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올 5월 6일 776억원의 과징금 부과와 검찰 고발을 발표했다.
2012~2018년 벤츠코리아가 경유차 12종의 배출가스 프로그램을 조작한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환경부 고발에 따라 검찰은 5월 27일과 28일 벤츠코리아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공교롭게 벤츠본사는 5월 1일 실라키스 사장을 미국으로 발령내기로 했다. 또 실라키스는 검찰 압수수색 전에 출장을 나간 뒤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실라키스는 최근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환경부 조사발표 시기를 사전에 알지 못했고, 검찰 수사 일정을 알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연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글로벌 기업들이 코로나19인 상황에서 출장을 자제하고 있다. 환경부 고발에 의해 강제수사를 앞둔 상황, 코로나19로 자유로운 이동이 어려운 상황에서의 출장이 우연이라는 주장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2018년 서울시는 실라키스 사장을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했고, 2019년 새해를 맞아 '제야의 종' 타종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에 근무하던 시절 남다른 대우를 받아놓고선 법적 책임을 묻기 전에 줄행랑 쳐버린 것이다.
◆반복되는 줄행랑 = 문제는 이러한 수입차업체의 CEO 도피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환경보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요하네스 타머 폭스바겐아우디코리아(AVK) 대표가 대표적이다. 2017년 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기환경보전법 위반 등의 첫 공판에 타머는 출석하지 않았다. 해외 출장을 이유로 출국금지를 풀고 출장을 떠난 그는 재판을 앞두고 현재까지 귀국하지 않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키쿠치 타케히코 한국닛산 사장도 한국에서 법적 책임을 피한 경우에 속한다.
환경부는 2016년 6월 배출가스 조작 의혹이 있다며 한국닛산을 검찰에 고발했다.
키쿠치 사장은 검찰 수사가 시작된 얼마 뒤 사임한 후 한국을 떠났다. 검찰은 한참 뒤인 2017년 말에야 한국닛산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한 뒤 회사 중역 등 임직원들을 기소했다. 인증 담당 실무자가 징역형 처벌을 받았지만 키쿠치 사장 등 핵심 경영진들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한 것이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꼬리 자르기가 아닌 머리 자르기가 이어지고 있다"며 "글로벌 기업이 한국의 법적 절차를 지킬 자신이 없다면 철수하거나 한국인 대표를 내세우던지 철저한 현지화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유독 외국인 CEO를 내세운 기업의 도덕적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며 "이들의 도피를 구경만 하고 있다면 누가 법적 사회적 책임을 지려고 하겠느냐"고 꼬집었다.
◆"형사사법 주권 행사해야" = 실라키스 사장의 경우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혐의가 드러날 경우 범죄인 송환 등을 검토할 수 있다. 다만 수사 전 출국을 한 상태라 혐의를 입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타머의 경우 범죄인인도 청구를 추진하고 있지만 별다른 변화가 감지되고 있지 않다. 법무부와 검찰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한국 정부는 현재 독일 사법당국과 범죄인인도 청구 등 관련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구체적인 내용은 조약상 확인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디젤차 소비자들의 민사소송을 대리했던 하종선 변호사는 "디젤게이트와 관련된 수사는 사실상 실무자들만 처벌하는 선에서 끝났다"면서 "법원과 검찰이 형사사법주권을 행사해 재발방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미국은 폭스바겐과 아우디의 독일 본사 간부들을 집요하게 추적중이다.
관련 외신을 종합하면 미국 디트로이트 연방검찰은 2019년 1월 아우디 엔진개발 담당 악셀 아이저 부사장 등 4명을 클린 에어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디트로이트 연방검찰은 이들이 10년간 미국 규제기관을 속인 채 소비자들에게 차량을 판매해 왔다고 봤다. 디젤 승용차 배출가스 프로그램 조작 사건 이후 3년 만에 관련자들의 추가 범죄 혐의를 찾아낸 것이다. 기소 이후 미국이 아이저를 수배했고, 지난달 크로아티아 국경에서 체포했다. 현재로서는 미국 송환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