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유럽 톺아보기
유럽 에너지와 환경의 복합 방정식
두차례 대선 TV토론을 통해 유럽의 환경과 에너지정책이 가시적인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발언에 따라 '유럽연합(EU)의 택소노미'나 'RE100' 같은 생소한 단어들이 언론에 가득하고, 원전을 둘러싼 윤석렬 국민의힘 후보와 심상정 후보의 논쟁이 달아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유럽의 환경정책에 대한 논의 자체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외국의 정책을 자기 진영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제멋대로 해석하거나 왜곡하는 일은 곤란하다. 외국 사례를 한국에 끌어다 활용할 때는 최소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유럽 정책, 구체적 상황 확인하고 써야
첫째, 외국 사례가 맹목적인 사대주의의 대상이 되면 위험하다. 유럽은 여러 분야에서 우리보다 선진국이지만 그들 역시 심각한 정책 문제들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이나 프랑스는 수십년 동안 환경보호를 내세워 디젤자동차를 정책적으로 장려했다. 나중에 살펴보니 자국 에너지 및 자동차 업계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정부의 농간'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지난 2015년 미국에서 폭로된 폭스바겐 디젤게이트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둘째, 외국 사례의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환경정책에서 EU의 가장 대표적인 틀은 '유럽 그린 딜'(European Green Deal)이라고 불린다. 환경에 대한 유럽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2050년 탄소중립 도달이라는 법적의무를 규정했다는 점이고, 2030년까지 1990년 기준 탄소 배출의 55%를 줄이겠다는 '핏포 55'(Fit For 55)다.
셋째, 유럽 사례는 현지의 특수한 환경을 반영하기 때문에 한 부분만 가져다 인용할 때는 무척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정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무리한 논리를 전개하다가는 자신의 무지만 광고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후보의 캠프나 보좌진, 진영이 나뉜 언론들은 이런 원칙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례로 여당 후보가 들고 온 'EU 택소노미'는 유럽 현지 언론에서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관료들의 전문용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따옴표를 치고 부연설명을 해서 사용하며, 프랑스 르몽드는 "혐오감을 주는 용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또한 '소위'(so-called)라는 표현을 앞에 붙여서 사용할 정도다.
게다가 택소노미라는 용어가 적용되는 분야는 유럽 환경정책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그린 딜'이라는 종합 정책 청사진에는 8개의 정책 분야가 있다. 깨끗한 에너지부터 산업, 건축, 농업과 식량, 공해 제거, 모빌리티, 생명 다양성을 거쳐 금융까지다.
택소노미는 8번째 금융 분야에 적용되는 환경친화적 산업 목록을 뜻한다. 택소노미에 들어갔다고 EU가 포괄적으로 그린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 분야에서 지속가능성을 인정받아 투자가 집중되도록 유도한다는 참고 목록일 뿐이다.
물론 이것도 다 정책적 청사진일 뿐, 유럽 국가들 사이에 구체적으로 합의된 내용은 없다. 2020년대 중반쯤 구체적으로 목록이 결정되고 목록을 무엇에 어떻게 쓸지도 합의할 예정이다.
실제 예리한 전문가들은 택소노미는 허울일 뿐이고 사실 더 중요한 부분은 EU 차원에서 관리하는 국가보조금 정책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산업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금지하는 유럽이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면 택소노미에 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택소노미는 결국 유럽 환경정책의 빙산의 일각일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 변화할 '움직이는 표적'인 셈이다.
전력망 통합된 유럽, 고립된 한국과 달라
한국에서 볼 때 원전 문제는 훨씬 중요하다. 프랑스는 원전을 지속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유럽에서 원자력을 녹색산업으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세력이다. 반면 독일은 탈원전을 결정한 유럽의 중심 경제세력이다.
우선, 에너지 정책에 있어 프랑스와 독일을 비교하려면 가격을 살펴보는 일로 시작하는 것이 적합하다. 최근 워낙 가격변동이 심하지만 2021년 상반기 통계를 보면 소비자가 부담하는 전기 가격은 독일(0.32유로/kWh)이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프랑스는 0.19유로/kWh로 EU 평균 0.22유로/kWh보다 저렴한 편이다.
탈원전을 추구하는 독일에서 전기가격은 계속 인상되는 경향이고 원전을 계획대로 모두 포기할 경우 2030년 핏포55의 탄소배출 축소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이라는 문제도 제기된다.
다음,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많이 전기를 수출하는 나라이며 세계적으로도 전기 수출 대국이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유럽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에 속한다. 유럽 전기 시장을 논할 때 프랑스와 독일 양국 간 수출입 통계가 아니라 국가 단위의 '전기 수지'를 포괄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게다가 유럽은 단일시장을 형성하고 있기에 EU가 강력한 경쟁정책을 편다. 프랑스의 전기공사 EDF는 원자력을 통해 매우 저렴하게 전기를 생산하나 경쟁 기업에 생산량 일부분을 '울며 겨자 먹기'로 넘겨야 한다. 프랑스 시장을 한 기업이 독점해서는 곤란하다는 유럽의 정책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요가 늘어나면 부족한 부분을 외국에서 비싼값에 수입해 충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유럽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프랑스가 굳이 비싼 독일 전기를 부분적으로 수입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택소노미와 전기 사례를 통해 외국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세력은 유럽의 사례를 겉핥기로 가져다 인용하지 말고 정말 배울 만한 요점을 파악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유럽은 하나의 전력망, 일명 슈퍼그리드로 연결되어 있다. 독일이 탈원전을 추진하다 크게 실패하더라도 이웃 프랑스의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있고, 프랑스가 원전의 방향으로 가다가 거꾸러지더라도 독일의 재생에너지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정책을 추구하면서도 이웃나라가 '미래의 보험'이 되어주는 모습이다.
유럽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너무나 고립된 취약한 상황이다. 가까운 나라와 전력망의 연결이야말로 공급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국가 전략의 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비단 전기 생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에너지와 환경의 복합적인 방정식을 찾는 데 필수적인 선택의 문제다. 북한 중국 일본 대만 러시아 등 어떤 국가와 연결하고 힘을 합치는 것이 바람직할지를 선택하는 것이 진정 중요한 한국의 과제다.
앞서 '미래의 보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향후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심화할 경우 최근 유럽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의 에너지 확보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를 위협하는 러시아가 가스를 잠그더라도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이웃에서 전기나 가스를 수입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또 중국은 계속 원전을 늘리고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국만의 탈원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주변에 국경을 맞댄 동맹국이 없는 한국은 미래 에너지 공급의 안정성과 다양성 확보가 급선무다.
에너지와 환경, 안보문제와 연결
또 에너지와 환경은 안보와 국제관계까지 확장되는 국가전략의 핵심 사안이다. 프랑스가 원전을 고집해도 탈원전의 독일이 눈을 감는 이유는 원자력이 프랑스 핵 군사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안보는 기본으로 미국의 핵우산이 보호하나 독일은 이중(미국과 나토), 삼중(프랑스와 EU)으로 보호막을 확보함으로써 러시아와 같은 예측불허의 호전적 독재 세력과 마주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와중에 EU가 원전과 가스에 그린라벨을 붙이는 데 독일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