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현장 리포트
미국은 지금 '문화전쟁'(Culture War) 중
주로 공화당이 집권한 주들을 중심으로 공립학교와 도서관에서 특정 주제를 다룬 도서들을 금지하려는 움직임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 보수 성향의 개인이나 단체들이 시작한 일종의 '이데올로기 전쟁'에 공화당 우파 정치인들이 지지기반을 의식해 가세하면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에 대한 검열과 금서조치가 확대되고 있다
지난달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도서관협회(American Library Association, ALA)의 연례컨퍼런스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끈 거대한 의자가 등장했다. 2021년부터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는 검열과 금서 조치에 맞서 참가자들이 이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로 대형의자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금서'를 읽는 행사를 벌였다. 컨퍼런스의 주요 포커스 또한 금서조치에 맞서 어떻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지킬 것인가였다.
노벨문학상 작가 작품도 금서 대상
지금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학교와 도서관이 이른바 '문화전쟁'(Culture War)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주로 공화당이 집권한 주들을 중심으로 공립학교와 도서관에서 특정 주제를 다룬 도서들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다. 보수 성향의 개인이나 단체들이 시작한 일종의 '이데올로기 전쟁'에 공화당 우파 정치인들이 지지기반을 의식해 가세하면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에 대한 검열과 금서조치가 확대되고 있다.
ALA에 따르면 특정 도서들을 학교와 도서관에 비치하지 말라는 요구가 2022년 한해 동안 전년 대비 40% 이상 증가했다. 이는 ALA가 20년 전 처음 집계를 시작한 이래 사상 최고치다. 2022년 2571권의 책들에 대해 금지요청이 들어왔는데, 이는 2019년 566권, 2021년 1858권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금서들은 대부분 유색인종과 성소수자 등 전통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사람들이 등장하는 책들이다. 인종차별과 함께 유색인종에 대한 경찰의 폭력성을 다룬 책들도 자주 금서목록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금서 요구를 받은 책은 '젠더퀴어'라는 책이다. 저자인 마이아 코베이브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오랜 시간 성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논바이너리(남성과 여성 이분법적 성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자 무성애자로 커밍아웃하는 과정을 담은 만화 형식의 회고록으로 최근 한국에도 번역됐다. 다양한 성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는다고 평가받는 이 책은 ALA가 12~18세의 청소년에게 특별히 영향을 미친 책에 수여하는 '알렉스상'을 받았고, 퀴어의 경험을 다룬 책을 쓴 공로로 '스톤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학부모들은 이 책이 선정적이고 청소년에게 해롭다며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종차별이나 미국의 어두운 인종주의 역사에 대해 다룬 책들 또한 금서목록에 많이 올랐다. 예를 들면 미국 흑인여성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은 ALA 발표에 의하면 금서 요구를 가장 많이 받은 책 3위에 올랐다. 강간과 근친상간을 언급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지만, 이 소설은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들의 삶과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낸 것으로 호평을 받는 작품이다.
또한 최근에는 지난 2021년 1월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때 어맨다 고먼이라는 흑인 여성 시인이 낭독한 축시가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에서 금서가 돼 화제가 됐다. 어맨다 고먼은 당시 불과 22세로 역대 대통령 취임식 축시를 읽은 최연소 시인이다. 그가 낭독한 '우리가 오를 언덕'(The Hill We Climb)은 이날 취임식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약 6분에 걸쳐 낭독된 그의 시는 많은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시가 "분열을 넘어 통합의 희망을 담았다"며 "민주주의의 결속과 구원, 화해를 노래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이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디에드 카운티의 초등학생들은 이 시를 읽을 수 없다. 한 학부모가 시의 내용이 '교육적이지 않고 간접적으로 혐오 메시지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학생들을 세뇌시킬 것'이라며 도서관에 시집을 비치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학교는 이를 받아들여 모든 학생들이 그 시를 읽을 권리를 박탈했다.
금서조치는 단순히 책을 도서관에서 치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지난 2년 동안 적어도 7개 주에서 선정적이거나 학생들에게 '해로운' 책을 비치한 학교와 공공도서관 사서들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법이 통과됐다. 다양한 주제와 의견을 학생들과 논의하고 가르치려는 교사들과 사서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텍사스의 한 카운티에서는 '17종의 금서를 도서관에 다시 배치하라'는 연방법원의 판결에 반발해 학군 내 모든 도서관들을 영구 폐쇄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다행히 불발로 그쳤지만 이 정도면 21세기판 분서갱유라 할 만하다.
학부모 권리인가, 사상의 자유 억압인가
다음 대선에 트럼프에 맞설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떠오른 디샌티스 주지사의 플로리다는 최근 이른바 '돈 세이 게이법' (Don't Say Gay - 게이에 대해 말하지 마라), 즉 공립학교에서 성적 지향성과 성 정체성에 대한 교육과 토론을 금하는 법을 초등학교 저학년뿐 아니라 고등학교 12학년까지 전체 학생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통과된 법안은 원래 초등학교 3학년까지 적용되는 것이었다. '학부모의 교육권리법'이라는 정식명칭의 이 법 아래서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교사는 학부모에 의해 검찰에 고발당할 수 있다. 아칸소 아이오아 등 최소 15개 주에서 유사한 법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알려졌다.
또한 플로리다주에서는 학교에서 인종차별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법안도 통과됐다. 인종이나 성별, 출신 국가에 근거한 과거의 역사적 잘못에 대해 학생들이 책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주제에 대해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다. 한 학부모의 말처럼 "내 아이가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백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인종차별도, 이성애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성 정체성에 대한 논의도 공교육에서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도들이 학부모의 권리라는 미명 하에 실상은 교육의 내용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도덕성의 관점에서 검열하면서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제한하는 비민주적인 행위라고 지적한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무지 그리고 주관적으로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적으로 소외됐던 사람들의 삶에 대한 논의와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또한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떤 책들을 읽힐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관점을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소수의 극단적 우파가 상황 주도
현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큰소리를 내는 소수의 사람들로 보인다. 미국인들 다수는 금서조치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ALA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71%의 유권자들은 공공도서관에서 특정 도서들을 금지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자신을 공화당 지지자라고 밝힌 사람들 중에서도 금서조치에 반대한다고 답한 사람들이 70%였다.
뉴욕의 브루클린 공공도서관은 다른 지역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들을 전자책과 오디오북 형태로 미 전역의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금서 해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시애틀 공공도서관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개설해 이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또한 일리노이주에서는 최근 미국 최초로 도서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기존의 가치관과 정서에 반하는 새로운 사회 분위기와 변화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언제나 있어 왔기에 지금의 진통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피해를 보는 이들은 다양한 견해와 주장을 직접 듣고 스스로 판단할 힘을 배워야 할 학생들일 것이다.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침묵하고 있는 다수가 이제 큰소리를 내야 한다고 ALA 컨퍼런스에 모인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