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원 기자의 외교·통일 포커스 │북한 신흥세력 '돈주'의 등장
"북 김정은 정권, 경제성장 위해 사금융 용인"
"북 개인사업에 '고위험 고수익' 적용되는 사회" 분석 … "금융시스템은 16~18세기 유럽 수준" 평가
지난 2012년 6월 북한은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일명 6·28 방침)을 발표했다. 6·28 방침은 농업의 '분조관리제 안에서의 포전담당제', 공업의 '경영권한을 현장에 부여한 것'과 '노동자·농민의 일욕심을 돋구는 것'이었다.
김정은 정권이 주창하는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은 '경영권리를 현장에 부여'하고 '일한 만큼 분배'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인센티브 제도로 생산성을 올릴 수 있게 됐고 경영권을 현장에 주면서 사금융이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도 생겨났다.
10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독일 프리드리히나우만재단이 주최한 '북한과의 비즈니스와 금융' 국제학술회의에서는 김정은의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이 운영되는 데 있어 사금융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돈주'와 정권의 결탁 =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북한에서 사금융이 증가한 원인은 김정은의 우리식 경제관리방식 도입 때문"이라며 "우리식 경제관리방식을 도입하면서 정권이 사금융을 용인해주면서 양성화됐다"고 설명했다.
임 실장은 "과거에는 북한에서 돈이 많아도 많다는 얘기를 못했는데 이제는 돈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과시해야 사업 아이템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돈이 있다는 걸 알리는 분위기가 됐다"면서 "김정은 시대 들어 사금융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판 붉은 자본가인 '돈주' '돈장사' 수십만명이 성장하고 있다"면서 "국가 경제를 일으키려는 김정은 정권과 돈주가 협력해나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치 권력이라는 기득권 외에 돈주가 신흥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북한의 공장기업소마다 경영자율권이 부여되면서 북한 내부에서 돈 있는 사람들이 기업소 곳곳에 편입돼 중책을 담당하고 사실상 경제를 이끄는 주역이 됐다. 임 실장은 "지금 북한 경제는 자금력을 갖춘 돈주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돈주' 또는 '돈장사'라고 불리는 사금융이 등장하는 동시에 개인영업도 발달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임 실장은 "다양한 자영업이 발전하고 있는데 자영업의 발전 이유는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라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고위험 고수익)'이 확실하게 적용되는 사회가 북한"이라고 주장했다. 또 "개인 영업 과정에서 돈주들이 체계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개인사업과 대부업의 성행 =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도 과거와 달리 김정일 시대를 거치면서 '사설' 금융 서비스가 나타나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예전에는 국가의 배급을 받으면 됐지만 점차 상황이 나빠지면서 개인이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란코프 교수는 "1994년까지 북한에서는 금융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이뤄졌다"면서 "과거에는 돈이 아무런 역할을 못했지만 당국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시대에는 사금융 서비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돈을 벌기 시작한 사람들이 투자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돈 장사'가 시작됐다"면서 "이후 외화벌이와 대부업이 활성화됐다"고 덧붙였다.
란코프 교수는 "점차 대출이 일반화됐고 2000년경에는 연 이자율이 150%였다"면서 "지금은 사채금리가 많이 낮아져서 50~60% 정도"라고 전했다.
그는 "흥미로운 것은 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개인뿐만 아니라 국영기업에도 대출을 해주는 것"이라면서 "작은 비료 공장에서 돈이 필요했을 때 장비 구매를 위해 현지 돈주로부터 돈을 빌려 갔다"고 말했다. 빌려간 돈은 현금으로 상환하지 않고 비료로 상환되며 이러한 현물 상환이 일반적인 구조라고 란코프 교수는 설명했다.
경제성장으로 사금융의 역할이 커지면서 정권이 화폐개혁 등의 방식으로 사적 자본을 뺏는 일은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전망된다. 임 실장은 "김정은은 주민생활 향상을 위해 경제목표에 매진하고 있고 이런 수요가 있는 한 사금융과 정권과의 결탁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자영업, 대부업이 발달하면서 빈부 격차, 생활 수준 차이도 심화되고 있다. 사금융에 접근하지 못하는 주민들은 여전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북 해외 송금시스템 '구식이지만 안정적' = 주민들이 편리하게 입출금할 수 있는 상업은행이 사실상 없는 북한에서 사금융은 모든 금융서비스를 맡고 있다. 대출과 송금 등의 기본 금융서비스가 모두 돈주들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란코프 교수는 "북한 경제 시스템은 개인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라며 "과거 개인이 돈을 벌면 공식 계좌에 입금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90년대 초 인플레이션이 심해지고 돈을 되찾기 어려워지면서 주민들은 입금이 능사가 아니라는 거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장마당 등 '시장경제의 맛'을 조금씩 보게 된 북한 주민들은 점차 송금이나 환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하지만 현재 북한의 송금 시스템은 16~17세기 유럽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란코프 교수는 평가했다.
그는 "기업을 운영하려면 돈이 유통돼야 한다"면서 "북한에서 국내 송금과 해외 송금 네트워크가 굉장히 안정적으로 확립돼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예를 들어 평양에서 원산으로 송금을 하게 되면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평양 사람에게 돈을 주면 원산에 있는 파트너가 돈을 주는 구조로 돼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송금은 주로 화교들이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살고 있는 화교는 북한 주민에 비해 제약에서 자유로운 편이기 때문에 사금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란코프 교수는 "지난 20년간 북한에서는 무에서 유로의, 상당히 효율적인 금융시스템이 구축됐고 소거래 소규모 기업이 가능한 금융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하면서도 "하지만 현대적인 금융시스템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익명성 가진 '나래' 전자카드 발전 가능성 = 북한의 외화 전자결제카드인 '나래' 카드는 2010년 12월부터 발행돼 사용되고 있다. 나래 카드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평가와 달리 추이원 중국 옌볜대 교수는 익명성과 할인 효과를 들며 향후 발전 가능성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는 "나래 카드는 모든 대금 지불을 무현금결제 방법으로 신속하게 할 수 있고 상점 등의 봉사단위에서 거스름돈을 못 받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나래 카드는 외국인이나 내국인 구분 없이 수중에 외화만 있으면 발급받을 수 있으며 발행처에서 고객의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익명성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나래 카드로 대금을 결제하면 결제금액의 2% 정도가 할인돼 나래 카드 사용 고객은 경제적 실익을 얻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영수증에 북한 환율이 나타나지 않고 달러와 유로, 위안화 환율시세가 찍히기 때문에 당국이 외부에 북한의 환율을 공개해야 하는 부담도 없다고 밝혔다.
◆사금융 발전 못 따라가는 법제도 = 경제발전에 따라 북한에도 개인영업과 사금융이 대두했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여러가지 개혁조치가 이뤄지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핵심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인 소유'다. 생산수단을 개인이 가질 수 없다는 얘기다.
미무라 미쯔히로 ERINA 조사연구부장은 "북한의 공적인 금융제도는 사회주의권 국가가 있던 1980년대와 비슷하다"면서 "제도적으로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무라 부장은 "자본주의 국가와 달리 북한에서는 법적, 제도적으로 개인 재산에 대한 보호 장치가 없다"면서 "개인 사업자들이 돈을 빌려주면 채무자가 언제 갚을지에 신경써야 된다"고 말했다.
지난 2006년 '상업은행의 설립, 업무, 감독을 법제화'하는 상업은행법이 제정됐지만 북한에 실제 상업은행은 없다. 미무라 부장은 "상업은행이 없는 것은 북한 금융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라며 "결국 해법은 상업은행 설립"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상업은행 설립을 위한 자본 마련이나 운영 관리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