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5주년 특별기획 - 국책연구기관장에게 듣는다│김연철 통일연구원장
"군사합의 이행엔 한미 공감대 … 속도 내야"
남북이 앞서는 건 당연, 속도차는 미국 후퇴 탓
현실성 없는 '신고 프레임'으로 시간 낭비
신뢰구축과 비핵화 실천조치 동시 진행해야
북측과 '통일방안' 학술 교류사업 추진할 것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사진)은 최근 제기되는 '남북관계 속도조절론'과 관련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속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한국과 미국의 보폭이 벌어진 것은 한국이 한발 더 나아가서가 아니라 미국이 한발 후퇴했기 때문"이라며 "미국이 속도를 내도록 우리가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신뢰가 없으면 핵 신고는 오히려 파탄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데도 현실에 맞지 않는 '신고 프레임'에 빠져 (북미가)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면서 또다시 교착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북미관계의 해법으로 '신뢰구축과 비핵화의 실천적 조치 동시 진행'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경제적 제재 완화와 달리 남북간 군사분야 합의 이행에 대해선 한미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행이 가능한 부분에서 좀 더 속도를 낼 것을 주문했다.
김 원장은 이론과 현장 경험을 겸비한 남북관계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성균관대에서 '북한 산업화와 경제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경제연구소 북한경제팀 수석연구원, 경실련 통일협회 정책위원, 민주평통 자문위원, 민화협 정책위원 등을 역임했다. 노무현정부 시절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으로 통일정책에 관여하기도 했다. 2010년부터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로 지내다 올 4월 통일연구원장에 취임했다.
1일 서초동 사무실에서 김 원장을 만나 한반도 정세에 대해 들었다.
■ 2차 북미정상회담이 늦어지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결국 철학의 문제다. 방법론의 문제라면 실무차원에서 기술적 쟁점에 대해 논의해 대안을 찾을 수 있을텐데 지금은 방법의 문제로 넘어갔는데도 여전히 비핵화의 개념과 원칙을 놓고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를 크게 '강압적 비핵화'와 '협력적 비핵화'로 나눠볼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간 신뢰구축을 통해 비핵화를 하기로 합의하지 않았나. 그런데 미국은 여전히 '강압적 비핵화', 그러니까 비핵화될 때까지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것인데 북한 입장에서는 싱가포르 합의와 미국의 정책에 일관성이 있느냐 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 비핵화의 원칙과 과정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고 그게 교착의 원인이라 봐야할 것 같다.
■ 김정은 위원장이 정말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는지, 미국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불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비핵화를 일방적 시각에서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일종의 상호관계로 접근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있느냐는 질문은 우리가 비핵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연결된다. 북한은 비핵화 의지가 있지만 다만 '상응조치가 조성되면'이라는 조건절이 달려 있는 것 아니겠나.
■ 미국은 먼저 '핵 리스트'를 내놓으라는 것인데
문제는 북한이 '핵 리스트'를 제출했을 때 그걸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신고는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 북한이 100%의 리스트를 제출한다고 해도 이를 믿지 못하면 오히려 파탄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신뢰를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동안 비핵화 조치가 중단되어선 안된다. 신뢰를 쌓는 과정과 비핵화 조치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해체 등을 제시한 것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는 차원에서였다고 본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신뢰 형성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 생각한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비핵화를 할 것이냐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신고와 검증, 사찰로 이어지는 비핵화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것이다. 실제 비핵화 사례를 봐도 교과서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곳이 적지 않다.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이후 벌써 다섯 달 가까이 돼 가는데 '신뢰형성과 비핵화의 실천적 조치 병행'이라는 싱가포르 합의문을 이행했다면 이 기간 중 많은 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에 전혀 맞지 않는 '신고 프레임'에 빠져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안타깝다.
■ 미국은 비핵화 전 제재완화는 안된다는 입장인데 신뢰구축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보나.
제재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많다. 우선 인도적인 면제조항이 있다. 미국도 유해발굴사업을 하겠다고 했고, 그 부분은 대규모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경제시찰단이 미국에 갈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인적교류다. 인적교류는 제재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미국은 독자적으로 북한에 대해 여행금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여행금지 조치를 신축적으로 운영하는 건 제재 틀을 유지하면서도 할 수 있는 신뢰조치다. 이 외에도 찾아보면 많이 있다.
■ 최근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방한한 것을 두고 미국이 우리 정부에 남북관계의 속도조절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관측이 많은데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남북미 삼각관계에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동일한 속도로 가기는 쉽지 않다. 미국과 한국의 대북정책 목표는 같지만 정책 우선 순위 등에서 다를 수 있다. 그건 당연하지 않나. 올해만 돌이켜봐도 남측 특사가 북한에 가서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낸다던가, 또 북미정상회담이 연기됐을 때 다시 조율한 것도 다 남북관계를 통해서였다. 남북관계가 북미관계보다 반발, 한발 앞서 나가는 건 당연한 것이다.
물론 대북제제 등이 있어 한국이 한발 이상 나가긴 어렵다. 그런데 지금 한국이 한발을 더 간 게 아니고 미국이 한발 후퇴하는 바람에 한국과 미국의 보폭이 벌어진 것 아닌가. 그러면 이 상황에서 한국도 한발 후퇴해야 하느냐. 그건 아니라고 본다. 결국 미국이 다시 보폭을 맞추도록 하는 노력을 우리가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미국 중간선거가 한반도 비핵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나.
누가 이기든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공화당이 이기면 현재 정책이 유지될 것이고, 민주당이 이긴다고 하더라도 결국 행정부의 선택이 중요하다. 재선을 준비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겐 북핵문제가 국내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판받는 건 '대통령 답지 않다'는 것인데 대통령다움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분야가 외교다. 그런데 성과를 낼 수 있는 외교 분야가 많지 않다. 미중관계는 쉽지 않을 것이고 결국 북핵문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서울방문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김정일 위원장과 비교해보면 김정은 위원장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대담하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방문을 위해선 평양정상회담의 합의를 이행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 북미정상회담이 늦어지면서 김 위원장의 서울방문도 늦춰질 것이란 관측이 있는데
현재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군사분야 합의 이행이다. 경제적 제재 문제를 놓고는 한미가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군사분야 합의 이행에 대해선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북한도 군사분야 합의 이행이 정세 관리에 있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미간 의견차이로 이행이 지체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행이 가능한 부분에서는 좀 더 속도감 있게 가야 한다. 종전선언이라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결국 군사분야 합의 이행이 전쟁 발발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줄여나가는 실질적인 노력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6.15공동선언에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성을 기반으로 통일을 지향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남북 통일방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점은 단계적, 점진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점진적, 단계적으로 할지에 대해선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데 우리 입장에선 남북연합 논의가 중요하다고 본다. 남북연합은 노태우정부 때부터 우리나라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이다. 그런데 남북연합 관련 논의들을 10년 이상 하지 못했다.
앞으로 남북연합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계획이다. 영연방 등 사례연구를 하고 남북 현실에 반영해 어떻게 제도설계를 할 것인지 연구하려 한다.
■ 통일연구원이 중점적으로 추진하려는 사업은 무엇인가.
우선 2가지 남북학술 교류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의 조국통일연구원과 함께 앞서 말한 남북통일방안의 공통점을 확인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한다. 채널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학자들이 참여해 학술교류를 하고 국내적으로도 합의를 모아가는 과정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또 통일연구원이 경제인문사회연구회 한반도평화번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연구회 소속 연구기관들과 함께 지식공유사업을 추진해보려 한다.
아울러 평화연구를 본격적으로 할 생각이다. 세계적인 평화연구소들이 한반도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 연구소를 한국에 초청해 한반도 문제를 고민하고 토론하면 국제사회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