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영민 대구YMCA 사무총장

"대구는 경상도 만세운동 진원지"

2019-03-04 10:50:00 게재

20세 미만 젊은층 다수 참여

100년 전 대구에서 일어난 3.8독립만세운동은 지역사회를 향한 YMCA의 가장 큰 외침이었다. 70명이 넘은 청년과 청소년들이 조선 형사법 제 42조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적게는 6개월에서 많게는 3년형을 받고 영어의 생활을 보냈다. 당시 심문을 받은 청소년중 15세에서 19세 이하도 상당수였다.

3.8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만집은 취조 과정에서 "조선인으로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만세를 부르는 것일 뿐이며 아무런 죄될 행동을 한 일이 없다. 자기나라 독립을 진심으로 바라는 만세를 부르는 것이 어떻게 보안법 위반이 되느냐?"며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피력했다.

그러면서 이만집은 제자나 교인 특히 20세가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자신과 같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 "너희들에게 무어라 묻더라도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으니 나에게 돌려라"면서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만섭은 2년 후 석방돼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쇠약한 상태에서도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다"며 주변을 독려했다. .

이만집으로 대표되는 대구독립만세 운동은 세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사상적 기반이 기독교계 및 불교계 천도교 등 억압된 현실과 내일에 대한 신앙의 모습이 혼연일체된 삶의로서 종교의 모습이었다.

다음으로 대구의 만세운동은 경상도 전역 만세운동의 기원이자 불쏘시개였다. 즉 서울 보신각이 전국 만세운동의 시발이었다면 대구는 당시 만세 운동에 있어 조선 남쪽의 가장 큰 봉수대였다.

또 하나 이 운동의 핵심은 젊은이들이었다. 젊은이들이 운동을 이끌어 가는, 그래서 경북과 경남에 불씨를 붙이고 민중을 깨우고 다녔다는 사실이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당시 일제는 "피고 이만집은 회중에게 지금은 한국이 독립할 시기로서 각 사람이 독립을 희망한다면 자연독립이 이루어지도록 만세를 고창할 것이라고 연설하고 먼저 만세를 불러 다른 피고와 군중이 이에 함께하게 하고"라고 판결했다. 판결문만 봐도 당시 대구만세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확고한 신념과 행동을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이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그때의 함성이 촛불이 되고 민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것을 경험했다. 100년 전 선조들은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 그리고 세상의 안녕을 위해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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