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패권 경쟁 속 대한민국 길을 묻다│① 20년 먹거리 반도체·배터리
'산업의 쌀' 반도체에 대한민국 생존이 걸렸다
미·중·유럽 공급망 확보전쟁 … 초미세공정 선점해야 미래 있어
세계 각국은 전쟁에 가까운 산업기술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제 겨우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대한민국은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 독자적인 기술경쟁력과 시장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선진국 간판을 내릴 수도 있다. 내일신문은 대한민국 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주요한 지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반도체·배터리경쟁력, 미래기술(인공지능·양자기술), 수출시장 3가지 측면으로 나눠 점검하고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지난달 우리나라 수출은 558억3000달러로 65년 한국 무역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반도체는 121억8100만달러로 수출 품목 가운데 단연 1위다.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1.8%에 달했다. 반도체는 9년째 수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뿐 아니라 세계 경제흐름을 좌우하고 있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중동 산유국을 중심으로 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결정하는 원유 생산량 조절이 산업동향에 가장 중요한 이슈였지만 이제 반도체 수급동향에 자리를 내줬다.
◆반도체 수급이 산업동향 최대 이슈 = 최근 위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외신들은 내년 말까지 반도체 공급난으로 세계 자동차업계는 총 4500억달러(약 530조원)의 매출 손실을 볼 것으로 전망했다. 시장조사기관 앨릭스파트너스는 올해 반도체 부족으로 인한 세계 자동차 생산량 감소 추정치를 770만대로 예상했다. 최근에 생산되는 자동차는 1대에 200~300개의 반도체가 쓰인다.
휴대폰업계도 반도체 수급문제로 제동이 걸리고 있다. 최근 외신들은 애플이 애초 연말까지 아이폰13 생산 목표치를 최대 9000만대로 잡았지만 8000만대 정도만 제작이 가능할 것으로 관측된다고 보도했다. 통신칩을 비롯한 반도체 수급에 문제가 생겨서다. 애플은 지난 9월부터 아이폰13을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제때 제품을 배송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상황은 삼성전자도 다르지 않다. 최근 내놓은 갤럭시Z플립3 등 폴더블 스마트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만 공급부족 때문에 사전예약을 하고도 한달 이상을 기다려야 제품을 받아보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 수급난에 따른 스마트폰 출하량 축소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D램 수요가 줄면 반도체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서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하락도 이같은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반도체, 국가 간 산업패권 경쟁의 핵심 = 최근 세계 각국은 자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가 전략무기로 인식되면서 기업 간 경쟁에서 국가 간 경쟁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같은 공급망 확보 경쟁은 반도체가 산업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려는 미국 정책에 따른 영향이 크다. 실제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설계와 장비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소재는 일본과 중국, 제조는 한국과 대만이라는 역할 분담이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에 유리하게 확보하지 못하면 산업패권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을 중심으로 공급망 구축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미국이다. 공급망 조사 행정명령, 보조금·연구개발(R&D) 지원 등이 포함된 국방수권법 발효 등을 잇따라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에는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반도체기업들에 45일 내에 재고·주문·판매 정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유럽연합(EU)도 10나노(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공정 기반 반도체 생산거점을 마련하고, 세계 반도체 점유율 20% 달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15년 발표한 '중국 제조 2025'를 통해 반도체 내재화를 강력하게 추진해왔던 중국은 미국의 집중적인 견제 속에 숨고르기를 하는 모습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는 설계·장비·생산 등을 모두 잘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중국이 추격을 안했으면 세계 반도체 공급망은 평화를 유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의 견제로 중국이 주춤해진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중국은 반도체 내재화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도체 강국 지위 흔들리는 한국 = 세계 각국이 반도체 공급망 확보경쟁을 벌이면서 한국의 반도체 강국 지위도 흔들리고 있다. 메모리에 편중된 산업구조, 소재와 장비 등 기반기술 부족, 만성적 인력부족 등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약점이다.
실제 메모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시장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지만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회사) 점유율은 2% 미만이고, 파운드리도 TSMC가 있는 대만에 큰 격차로 뒤쳐져 있다.
제조·공정 역량에 비해 뒤떨어지는 소재 장비 등 기반기술도 개선해야할 부분이다. 세계 20위 순위 반도체 장비사 가운데 국내업체는 2곳에 불과하다. 특히 최첨단 미세공정에 쓰이는 핵심 장비는 ASML 등 외국업체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경쟁력 있는 팹리스 기업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2020년 기준 팹리스 시장 한국 점유율은 1.5%에 불과하다.
만성적인 인력부족도 산업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큰 약점이다.
한편 정부는 지난 5월 종합 반도체 강국 실현을 위한 'K-반도체 전략'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 전략에서 2030년까지 민간이 510조원 이상을 투자해 세계 최대·최첨단 반도체 공급망을 완성하고 10년간 반도체 인력 3만6000명을 양성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반도체 소재와 장비 등 기반기술은 짧은 시간에 확보하기 어렵다"며 "새로운 반도체를 기획하는 초기단계부터 반도체 업체와 소재와 장비 기업들이 협력해 기반기술을 축적하고 반도체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목숨을 건 초미세 공정 확보 경쟁 = 한편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주요 기업들은 3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3나노 양산에 먼저 성공하는 쪽이 애플 구글 등 대형 고객사를 선점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새기는 회로선폭이 좁을수록 최첨단 제품으로 인정받는다. 회로 선폭이 좁을수록 저전력·고효율 칩을 만들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파운드리 사업에서 최첨단 미세공정 기술 확보는 반도체 집적도와 효율 측면에서 경쟁사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다.
삼성전자와 TSMC는 최근 3나노 이하 공정 계획을 공개했다. TSMC는 14일 게이트올어라운드(GAA) 방식의 2나노 공정 반도체를 2025년 양산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 7일 GAA 방식의 3나노 공정을 내년 상반기, 2나노 공정을 2025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3월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2024년 2나노 제품을 상용화할 예정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박재근 교수는 "반도체 사업 특성상 최첨단 공정을 완성하려면 엄청난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고, 1~2위 기업만 살아 남는다"며 "삼성전자 TSMC 인텔 등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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