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통장 개설 “은행 부실심사 따져봐야”
대법, 파기 환송 … “업무방해죄 다시 심리”
수백개의 ‘대포통장’을 만들어 보이스피싱범 등에게 넘긴 사람이 은행 계좌개설 업무방해 혐의로 원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이 파기환송했다.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려면 금융기관이 제대로 심사를 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기존 판례를 따른 것이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과 업무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에 돌려보냈다고 23일 밝혔다.
A씨는 2019년 공범 4명과 함께 명의 도용의 방법으로 35개 유령법인을 세운 뒤, 유령법인 명의로 602개의 계좌 즉 ‘대포통장’을 만들었다. A씨 등은 이렇게 만든 통장을 인터넷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 보이스피싱 조직 등 범죄단체 및 조직에 대가를 받고 팔았다.
1·2심 법원은 A씨 등의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조직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해 유령법인을 설립한 다음 그 명의로 계좌를 만들어 은행의 업무를 방해했다”며 “범행 경위, 내용, 방법 등에 비춰 그 죄질이 좋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업무방해 범행의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를 받지도 못했고, 피해도 회복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2심 법원도 A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피고인 가운데 A씨만 상고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업무방해 유죄’ 판단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원심판결을 직권으로 파기했다.
재판부는 “원심이 채택한 증거만으로는 A씨 등이 법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피해 금융기관들의 업무담당자가 금융거래 목적 등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했거나 이를 확인했는지 여부 등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금융기관 담당자들이 자료 제출 등을 요구했는지 여부에 대해 추가로 심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단순히 신청인의 허위 답변만을 그대로 믿고 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의 요구 등 추가적인 확인 없이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해준 경우, 계좌 개설은 금융기관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 때문이므로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지난해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은 A씨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에 대해선 원심의 유죄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다만 원심이 업무방해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하나의 형을 정했으므로 (사건) 전부를 파기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8월에도 금융기관 업무담당자가 계좌개설 신청인의 허위 답변만을 그대로 믿고 증빙자료 확인 없이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해준 경우에는 신청인의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바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당시 “계좌개설 시 예금거래신청서를 허위로 작성했더라도 업무 담당자가 추가적인 확인 조치 없이 계좌를 개설해 준 경우 금융기관 업무 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이라며 “계좌개설 신청인의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최초로 명시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