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 혁명, 당뇨·비만 넘어 의학 역사 새로 쓴다

2024-11-01 13:00:06 게재

건강 수명 행복에 광범위한 잠재력 … 이코노미스트 “만성질환 관리방식 변화 예고”

의학의 역사에서 예상과 달리 대성공을 거둔 몇가지 약물이 있다.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제 ‘휴미라’, 우울증 치료제 ‘프로작’, 심장병·뇌졸중을 예방하는 ‘스타틴’ 등이다. 이 약들은 모두 의약계의 초기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매일 수백만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이제 새로운 종류의 약물이 이 대열에 합류할 예정이다. ‘GLP-1 수용체 작용제’라는 새로운 약물이 앞서의 모든 약물을 대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 약물은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호르몬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의 작용을 모방한 것으로 당뇨병 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최근엔 체중감량법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3월 미국에서 과체중환자의 심혈관질환 치료제로 ‘세마글루타이드’가 승인됐다. 당뇨병 치료제 ‘오젬픽’과 체중감량제 ‘위고비’로 판매되는 GLP-1 수용체 작용제다. 4월에는 ‘티르제파타이드’(상품명 마운자로, 젭바운드)가 수면무호흡증에 대한 후기 임상시험에서 성과를 보였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비영리 연구기관 ‘스크립스 리서치’를 이끄는 심장전문의 에릭 토폴은 “GLP-1 약물은 의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약물 계열의 돌파구”라고 평했다.

체중감량보다 앞선 심혈관계 개선

GLP-1은 일반적으로 식사 후 사람의 장에서 방출되는 수명이 짧은 호르몬이다. 혈액에 들어가면 췌장을 자극해 혈당수치를 낮추는 인슐린을 방출하고 혈당수치를 높이는 글루카곤을 억제해 포도당 수치를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부분적으로 장에 작용해 음식물이 장에서 이동하는 속도를 늦추면서 포만감을 높인다. 이 호르몬은 뇌에도 작용한다. 배고픔과 포만감을 조절하는 시상하부와 갈망을 조절하는 경로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모방한 GLP-1 작용제가 당뇨병과 비만에 도움이 되는 이유다.

언뜻 보기에 GLP-1 약물의 광범위한 효과는 체중감량에 따른 부수적인 혜택처럼 보인다. 비만한 사람은 심장병부터 특정 암, 수면 무호흡증, 지방간 질환 등 다양한 건강문제에 훨씬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오히려 반대다. 세마글루타이드를 복용한 41개국 1만7600명 이상의 과체중·비만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체중이 약 10% 감소하고 심각한 관상동맥 질환, 뇌졸중, 심장마비 및 모든 원인에 의한 사망률이 2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정적으로 이같은 심혈관계 개선 효과는 의미 있는 체중감소보다 훨씬 먼저 나타났다.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경우 GLP-1 약물은 부분적으로 심장세포와 혈관의 수용체에 결합해 작용한다. 이는 혈압과 혈중지방 수치를 더 잘 조절하도록 돕는다. 또 이 약물은 심장세포가 포도당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케 하고 산화스트레스로 인한 손상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 세마글루타이드는 산화질소 생성을 자극해 혈관을 이완시키고 심장으로 가는 혈류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번에 여러가지 문제에 작용하는 GLP-1 약물의 능력은 흥미롭다. 심장병이나 당뇨병 위험이 있는 많은 사람은 과체중이거나 고혈압이 있거나, 혈중에 당분이나 해로운 지방이 너무 많을 수 있다. 이러한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약물이 존재하지만 GLP-1 작용제는 분자 단위에서 다목적으로 작용한다. 제2형 당뇨병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GLP-1 작용제는 인슐린 분비 감소, 근육 같은 말초조직에서의 인슐린 흡수 등 이 질환의 8가지 핵심결함 대부분을 개선했다.

캐나다 마운트시나이병원 루넨펠트-타넨바움연구소의 선임과학자 대니얼 드러커는 “GLP-1 수용체가 있으면 세포가 더 건강해지고 사멸에 덜 취약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보호효과는 세포에 GLP-1 수용체가 있고 그 호르몬 또는 약물이 도달할 수 있는 많은 장기에서 발견된다.

또 GLP-1 작용제는 신체의 특정 면역계 세포에 작용해 사이토카인으로 알려진 염증분자의 생성을 줄인다. 염증은 부상이나 감염에 대한 신체의 자연스러운 면역반응의 일부다. 하지만 만성염증은 결국 조직을 손상시키고 암과 심혈관 질환, 신경퇴행성 및 자가면역질환 같은 건강 문제의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 GLP-1은 장기에 존재하는 면역세포와 결합해 염증을 억제한다.

다목적 작용제

염증 감소는 당뇨병이나 비만을 위해 GLP-1 작용제를 복용하는 환자들이 관절염이나 궤양성대장염, 코로나 감염 뒤 뇌 안개 증상과 같은 다른 질환도 개선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공통점이다. 매사추세츠종합병원과 하버드 의대에서 비만을 연구하는 의사 파티마 스탠포드는 “통풍 및 기타 류마티스 질환 병력이 있는 환자들도 체중감량을 위해 GLP-1 약물을 복용한 후 증상이 개선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또 피부와 간, 신장, 심지어 뇌 자체의 염증에도 작용한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모든 장기가 세포표면에 GLP-1 수용체를 갖고 있거나 근처에 GLP-1 활성화 면역세포를 두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GLP-1 작용제의 항염증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이 약물이 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뇌에는 GLP-1 수용체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유해물질로부터 뇌를 보호하는 필터인 ‘혈액-뇌 장벽’을 통과할 수 있는 약물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험에 따르면 GLP-1 작용제는 뇌 깊은 곳에 있는 GLP-1 수용체에 신호를 전달하는 경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생쥐의 뇌에서 GLP-1 수용체가 차단되면 약물이 신체의 염증을 억제하는 능력을 잃는 것으로 나타났다. 드러커 박사와 동료들이 올해 1월 발표한 이 연구결과는 장과 뇌, 면역계 사이에 전신 염증을 조절할 수 있는 통신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피부나 폐, 근육 같이 자체적으로 GLP-1 수용체가 많지 않거나 전혀 없는 장기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염증을 줄이고 뇌 신경세포의 건강을 개선하기 때문에 GLP-1 약물은 알츠하이머 같은 신경퇴행성질환의 치료제로도 관심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GLP-1 약물은 학습과 기억력을 개선하고 설치류의 뇌에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축적되는 것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알츠하이머병을 유발하는 2가지 요인인 염증반응과 산화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 경증 알츠하이머병 환자 200여명을 대상으로 GLP-1 약물인 리라글루타이드로 치료한 임페리얼칼리지런던의 소규모 예비연구에 따르면 1년 후 뇌 수축이 거의 50% 감소하고 인지기능 저하가 최대 18%까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뉴욕 소재 대사·체중감량 클리닉인 ‘웰 바이 메서’의 설립자 겸 내분비학자 캐롤라인 메서는 “이러한 약물이 궁극적으로 기억상실에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이미 심혈관 질환과 뇌졸중의 위험을 줄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당뇨병과 알츠하이머 사이에는 인슐린저항성과 산화스트레스 증가 같은 많은 연관성이 있기에 이러한 종류의 약물이 유망하다”고 말했다. 알츠하이머는 뇌의 인슐린저항성과 관련이 있기에 ‘제3형 당뇨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GLP-1 작용제의 또 다른 유망한 길은 체중감량 치료제로 놀라운 성공을 거둔 핵심이유, 즉 식욕 및 보상감정과 관련된 뇌의 메커니즘과 상호작용하는 능력에서 비롯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오피오이드나 알코올을 남용하는 환자에게 다른 이유로 GLP-1 약물을 투여했더니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률이 낮아지고 술에 덜 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서 박사는 “이 약이 결혼생활을 구해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해 미국국립약물남용연구소의 신경약리학자 레안드로 벤드루스콜로는 사이언스지에 “세마글루타이드는 지난 수십년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약물”이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부부들을 구하다

GLP-1 작용제가 해법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분야는 노화다. 이 약물은 세포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염증, 산화스트레스 및 세포사멸을 줄인다. 이런 문제는 노화와 관련 질병의 가장 큰 위험요소다. 올해 2월 뉴욕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의 마이클 리온과 니르 바르질라이는 당국 승인을 받은 약물 중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12개 약물을 분석했다. 노화의 특징을 표적으로 삼는 능력에 따라 각각의 순위를 매겼더니 12개 중 GLP-1 약물은 4위를 차지했다. 높은 평가를 받은 메트포르민과 SGLT2 억제제 역시 당뇨병 치료제다.

문제는 평생 복용해야 하는 터라 비용이 크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일시적일 수 있다. 향후 수년 경쟁이 치열해지고 복제약이 출시되면 가격이 낮아지고 접근성이 확대될 전망이다. 인도와 중국 기업들은 이미 자국에서 특허가 만료되는 GLP-1 약물의 복제약 개발을 위해 경쟁하고 있다. 또 근육량 감소와 위장 부작용 등을 줄이는 연구가 진행중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GLP-1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됐다. 인간의 건강과 수명, 행복에 이처럼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약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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