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채 해병 특검 힘들면 국정조사라도
‘이슈를 이슈로 덮는다’는 속어는 뉴스생태계의 표피적 속성을 비판할 때 흔히 거론된다. 정치적·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어 감당하기 힘들 때 정색하며 문제 해결에 나서는 대신 임시방편으로 다른 문제를 부각시켜 대중의 관심을 돌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채 해병 순직사건은 자식 가진 부모들에게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운이 나쁘면 어느 날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내 얘기다. 늠름하게 군에 입대한 아들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기막힌 일을 당한 부모의 비통한 심정을 어찌 헤아리랴.
외압실체 수사는 감감 … 수사단장 박 대령만 항명죄로 3년 구형
떠들썩하던 채 해병 사건이 한동안 잠잠해졌다. 사건 진상규명을 가로막은 외압의 실체를 곧 파헤칠 듯 기대를 모았던 공수처 수사가 흐지부지 멈춰선 지 오래다.
채 해병 순직사건은 어찌 보면 너무도 구도가 단순한 사건이다. 폭우 실종자 수색에 군 장병이 동원된 것은 흔히 있던 일이다. 문제는 공명심에 들뜬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이 장병들에게 구명조끼나 구명로프 등 기본적인 장비도 갖추게 하지 않고 무리하게 수중에 투입시켰고, 한 장병이 빠른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 사망했는데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부당한 구명로비를 벌인데서 비롯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방적인 주장만 전해듣고 ‘격노’하며 국방부장관에게 ‘사단장 구하기’ 지시를 내리면서 일이 꼬인 것이다.
개정된 군사지원법 절차에 따라 혐의자를 적시해 경찰에 이첩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지고, 권력자의 부당한 지시에 고민에 빠진 해병대사령관과 참모진들. 부당한 지시를 따를 경우 그토록 다짐했던 채 해병 죽음의 진실을 밝히지도 못하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왜곡한 책임을 몽땅 뒤집어쓰며 불명예를 떠안아야 할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이 원칙대로 처리하면서 ‘항명죄’로 몰리게 된 것이 사건의 요체다.
대통령의 격노와 부당한 지시를 촉발시킨 로비의 통로로 김건희 여사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핵심인물인 이종호씨의 존재가 녹취록 등을 통해 드러났다.
외압 수사는 멈춘 가운데 군사법원의 박 대령 항명죄 재판만 진행돼 지난 21일 10차 결심공판이 열렸고, 군 검찰은 최고형인 3년을 구형하기에 이르렀다. 해병대 수사단장으로 채 해병의 억울한 죽음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가려내 경찰에 이첩하려했던 박 대령의 싸움은 해병대 전우들이나 시민들의 뜨거운 지지가 없었다면 결코 버텨내기 어려운 형극의 길이었다.
윤 대통령의 외압행사, 김건희 여사 로비통로 의혹, 이종섭 국방장관의 호주대사 임명과 조기교체, 박정훈대령 항명죄 덧씌우기 등 뉴스 앞머리를 달구던 채 해병 사건이 한동안 잠잠해진 것이 이슈로 이슈를 덮는 수법의 결과라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이슈로 떠오른 ‘명태균 게이트’가 윤석열 정권의 명운을 좌우할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민이 전혀 몰랐던 명태균이란 수수께끼의 인물이 음지에서 대한민국 정치판을 온통 휘젓고 뒤흔들었음이 녹음파일을 통해 드러나고 그 파장이 일파만파 번지면서 채 해병 사건은 자연스레 뉴스에서 밀려난 느낌이 짙다.
명태균을 매개로 한 윤석열·김건희 부부의 불법 공천개입 의혹, 여론조사 조작 의혹, 경선 및 선거조작 의혹 등은 하나하나가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뒤엎을만하다.
정치판 추악한 민낯 드러낸 ‘명태균 게이트’ … ‘이채양명명주’ 새삼 부각
대한민국 정치판의 온갖 민낯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 명태균 녹취파일에는 오세훈 서울시장, 이준석 의원,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김진태 강원지사, 박완수 경남지사, 김영선 전 의원, 조은희 의원 등등 유력인사들이 나온다. 누가 또 추가로 등장할지 모른다. 과연 이게 나라냐, 이게 정치지도자들의 본모습이냐 탄식이 절로 나온다. 기존 ‘이채양명주’에 명태균이 더해지며 ‘이채양명명주’란 조어가 자연스레 나온다.
명태균 이슈에 덮였든, 자연스레 밀려났든 채 해병의 억울한 죽음은 온 국민의 가슴속에 깊은 응어리로 남아 있다. 김건희특검법과 함께 번번이 대통령 거부권 행진에 가로막혀 있으나 어떻게든 채 해병 특검법을 통과시켜 특별검사가 진실을 낱낱이 가리도록 해야 한다.
국민의힘의 반대로 특검이 불가능하다면 우선 국회 국정조사라도 실시해야 한다. 강제수사권이 없고 청문회에서 증인들의 역겨운 거짓말을 또다시 지켜봐야 한다는 한계도 있지만, 그래도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울분을 촉발해 특검 필요성을 재삼 각인시키는 효과는 분명 클 터이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