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가을 단풍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2023-10-13 11:53:17 게재
윤경용 페루 산마틴대 석좌교수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번째 찾아오는 봄이다'라고 '이방인'을 쓴 알베르 까뮈가 말했다. 이것은 가을단풍의 아름다움을 가슴 깊이 표현한 말이다.

봄이 설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그리움과 아쉬움의 계절이다. 겨울을 이겨낸 봄꽃은 꽃망울을 터뜨리며 앞다퉈 피어나지만, 단풍은 여름의 온기를 지워내고 기어이 돌아온 가을에 순응해 붉고 노란 본래의 색을 드러내고 정들었던 가지를 떠난다. 이것이 단풍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단풍의 '단(丹)'은 붉은색을 뜻한다. 그런데 노란 은행잎도 갈색의 떡갈나무잎도 모두 단풍이라 불리는 이유는 붉은색이 가을빛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 '산행'의 마지막 구절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맞은 단풍잎은 봄꽃보다 붉어라)'가 가슴에 와닿는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다.

대부분은 단풍이 곱게 물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물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링컨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살아온 환경과 그 본성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는데 나뭇잎도 역시 그러하다.

철저한 에너지계산주의자 나무

나무는 모두 본래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다. '안토시아닌'이 많으면 붉은색, '카로티노이드'가 많으면 노란색, '탄닌'이 많으면 갈색이다. 그러나 이런 색깔들은 여름에는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는 활발한 광합성에 의해 엽록소가 가진 녹색이 이런 색깔들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물질이 조개의 속살을 파고들 때 조개는 체액을 짜내 파고드는 이물질을 감싸고 또 감싸며 몸을 보호한다. 그 이물질을 감싼 덩어리가 바로 영롱한 빛을 가진 진주다. 그래서 진주는 조개의 상처와 고통의 결정체다. 마찬가지로 단풍도 긴 겨울을 나기위한 고통스러운 준비과정 중 하나다.

나무는 잎을 통해 광합성을 한다. 이파리는 빛과 공기중의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뿌리가 빨아들인 물로 포도당을 합성하고 남은 산소를 공기중으로 내보낸다. 물론 나무도 호흡을 하기 때문에 사람처럼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낸다. 그러나 낮에는 이산화탄소보다는 광합성으로 나온 산소를 훨씬 많이 내뿜는다. 반면 밤에는 광합성을 못하고 호흡만 하기 때문에 순전히 이산화탄소만 내뿜는다. 그래서 밤운동보다는 아침운동이 건강에 이롭다.

엄동설한에는 나무 몸속의 물관에 물이 있으면 얼어 터져 나무가 생명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나무는 북풍한설 겨울을 나기위해 뿌리에서 잎으로 가는 물의 통로를 막아버린다. 물관이 막히면 광합성을 못하고 양분공급이 끊긴다. 그래서 물이 없어 광합성을 못하니 엽록소는 사라지고 이파리의 초록빛은 증발한다. 그리고 초록에 가리웠던 본래의 붉고 노란색이 드러난다. 이것이 단풍인 것이다.

나무는 철저한 에너지 계산주의자다. 단풍 든 노쇠한 나뭇잎에서 일어나는 근근한 광합성을 통해 얻는 에너지와 이 잎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하는 에너지 중 어느 것이 더 적은지를 판단한다. 낮의 길이, 기온, 강수량에 따른 땅의 습도, 강설에 따른 상고대 무게 등 복잡한 3차 다항식 계산이지만 나무는 이를 간단히 풀어 이파리를 떨어뜨려 버리기로 결정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야 화려한 단풍 뒤에 가려진 나무의 슬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존재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만한 고통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풍이 보여주는 절정의 아름다움, 그 이면에는 혹독한 겨울 추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간절한 자구책이 있다. 나무는 지속적인 삶을 위해 몸의 일부를 버리고 줄여 긴 겨울을 버틴다.

자연도 권력도 화무십일홍이거늘

일엽지추(一葉知秋,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안다)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작은 조짐만 보고도 전반적인 변화 추이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당나라 무명시인의 시 '산승불해수갑자 일엽낙지천하추(山僧不解數甲子 一葉落知天下秋)'에서 나온 말이다.

작금의 국제정세는 마치 구한말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 복잡하다. 하지만 국내정세는 더 그러하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보이면 곧 눈 쌓인 나뭇가지가 그려지는 것처럼 권력도 그렇다. 곧 얼어붙은 천하가 오리라는 것은 일엽지추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으니.

윤경용 페루 산마틴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