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 칼럼

지역구 쇼핑과 장기판 공천

2024-03-04 13:00:01 게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여야의 공천 작업이 끝나간다. 총선이 코앞이니 어쨌든 공천은 곧 마무리될 것이고, 이때부터는 누가 누구와 맞붙는다는 식의 대진표 뉴스가 그동안의 볼썽사납던 공천잡음 뉴스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새삼 확인하게 된 사실은 정치인에게 공천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라는 점이다. 공천을 못 받으면 국회의원 배지는 사실상 물 건너가는 것이고, 배지 떨어진 정치인은 어디 가서 사람 취급도 제대로 못 받는다는 게 여의도의 속설이다. 그러니 공천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 않고 또 서슴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응원은 못해도 양해는 해 줄 수 있다. 공천에서 탈락한 정치인이 분을 이기지 못해 앙앙불락하며 어제의 동지들을 향해 있는 힘 다해 침 뱉는 모습도 그러려니 하고 보아줄 수 있다.

정당 입장에서 어느 선거구에 어떤 후보를 내보낼지 결정하는 공천은 당의 명운이 걸린 문제다. ‘이기는 공천’이든 ‘혁신 공천’이든 나름의 전략과 목표 아래 누구를 쳐내고 떨어뜨릴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갈등과 파열음이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비명횡사(非明橫死) 친명횡재(親明橫財)라는 기괴한 사자성어까지 만들어낸 일방적 공천은 분명 너무해 보이지만, 그 책임을 오롯이 당이 질 것이라 생각하면 일반 유권자들까지 크게 흥분할 일은 아니다.

주권자 권리 맘대로 인용하는 게 문제

본질적 문제는 정치권이 유권자의 선거 주권을 마음대로 인용해 쓰면서 멋대로 포장하고 편리한대로 휘두른다는데 있다. 어느 지역을 한 선거구로 묶을지 행정구역상 경계를 정하는 선거구 획정은 선거 1년 전에 결정되어야 하건만 여야는 법정시한을 훨씬 넘긴 지난주에야 졸속으로 확정했다. 이때까지 유권자들은 어느 후보를 눈여겨봐야 하는지 몰랐고,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은 어느 지역을 누벼야할지 깜깜했던 셈이다.

본격적인 공천이 시작되자 정당은 선거구와 후보자를 대칭시켜 놓고 시뮬레이션이라는 명목으로 장기 게임을 시작한다. 차(車)와 포(包)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보고, 마(馬)와 상(象), 졸(卒)을 여기저기 들이대며 판을 주물러본다. 장기판 행마(行馬)가 진행되는 동안 특정 지역에는 특정 정치인이 어제 왔다가 오늘 다른 곳으로 가고, 내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짠~’ 하고 등장한다. 마지막 밥상이 차려지면 유권자는 밥이든 국이든 상 위의 메뉴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강요된 밥상에서 유권자 권리의 절반은 달아나는 셈이다.

지난해 말 현직 장관 신분으로 출마 지역을 저울질하던 한 정치인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가 지역구 쇼핑이라는 비판을 받고 내린 적이 있다. “전국 유람을 하다가 오늘 ‘분당을’까지 갔네요. 거의 유체이탈 수준. 서초 을을 갈지 분당 을을 갈지 뭐 또 다른 을을 갈지 모르겠지만 퇴임 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그는 실제 퇴임 후 서초 을과 분당 을을 지나 서울 중·성동 을 선거구에서 당내 경선을 치르는 중인데 엉겹결에 ‘또 다른 을’로 가는 자신의 행보를 맞힌 셈이 됐으니, 웃고 있을지 울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이 지역 경쟁자인 다른 후보는 3선을 한 부산을 버리고 종로에서 출마한다고 요란하게 선언하더니, 얼마 못가 슬그머니 지역을 옮기고는 “남은 정치인생을 중·성동 을에 바치겠다”고 외치고 있다.

또 다른 후보는 당초 경기 분당 출마를 예고하다가 서울 영등포에서 공식 출마선언을 하고 “경부선 철도 지하화의 첫 삽을 영등포에서 뜨도록 하겠다”는 공약까지 발표하며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더니 한달도 못가 돌연 경선 포기를 선언한다. 지역민들이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할 즈음 “당 지도부에서 강서 을 출마를 요청해왔다”며 전격적으로 지역을 변경한다. 두 지역 유권자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맞은 것처럼 난데없이 느껴질 것 같다.

아예 처음부터 “출마 지역은 당에 맡기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걸 당에선 ‘전략공천’, 해당 정치인은 ‘선당후사’라는 말로 포장하는데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지역 민심과 상관없는 낙하산 공천일 뿐이다. “우리를 뭘로 보나. 깃발 꽂으니 그저 찍어주란 말인가”하는 반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역구 쇼핑 언제까지 받아줘야 하나

출사표를 던진 정치인들이 “이 지역에 뼈를 묻겠다”고 할 때,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이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므로 특정 지역에 뼈를 묻어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다. 정치인의 지역구 변경은 그 자체로 정치도의상 비난받을 일도 아니며, 때론 고인 물 순환 차원에서 권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처럼 공천 과정에서 당내 정치상황이나 개인의 유·불리 판단에 따라 출마 지역을 아침 저녁으로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국을 유람하며 여기서는 이런 연고, 저기서는 저런 연고를 내세우고, 그때마다 뼈를 묻고 정치인생 건다고 하는 이들을 유권자들이 언제까지 받아주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종탁 신한대 특임교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