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비숲

젊은 영장류학자의 열대우림 분투기

2015-07-17 11:56:53 게재
김산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1만9500원

"한국 최초의 영장류 생태학자이며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인 김산하 박사(38)가 오늘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 구능할라문 국립공원으로 2년간 자바 긴팔원숭이의 생태와 행동을 관찰,연구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한국최초로 아픈 얼굴, 즐거운 얼굴등 '표정 있는 동물 그림'을 그려서 출판할 정도로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과 교감 해온 젊은 학자가 어떤 연구 성과를 글과 그림, 사진으로 담아가지고 돌아올지 기대가 큽니다."

이것은 저자 김산하 박사가 이 책의 인도네시아 긴팔 원숭이를 연구하러 떠나던 날의 가상의 저녁 메인(9시)뉴스를 내 나름대로 상상해본 것이다.

그로부터 8년 뒤에 이 책이 나온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도 한 적이 없는 야생 영장류에 대한 추적 조사를 단신으로 열대의 밀림 속에 뛰어들어 시도한 그의 행적과 모험은 충분히 뉴스가 될만한 사건이다. "무모한 지도교수의 권유와 그보다 더 무모한 저자의 선택이 자바 긴팔원숭이를 대한민국의 생태연구 부동산으로 만들었다"(지도교수 최재천)

'비숲'은 다양한 생명체를 품고 역동적인 삶을 보장해주는 비의 숲, 즉 열대의 우림(雨林)을 저자가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비가 탄생하고, 비가 몸을 맡기는 곳이 비숲이다. 비와 숲이 서로 만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곳.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연현상이다"

시인보다도 아름다운 글을 쓰는 저자의 필치와 깊은 밀림을 담은 사진들에 의해 이 책에는 그의 도착부터 추적 관찰 식사 사랑 일상 가족 도시 고생 친구 관계 여유 기록 여행 기억 녹지 앨범 그리고 떠남에 대한 모든 것이 세세히 담겼다.(실제로 이 항목들이 이 책의 목차이다)

동생이며 동지이기도 한 일러스트레이터 김한민이 그린 그림이 사진과 함께 실려 저자의 '무서운'경험과 긴장, 고통과 감동의 순간들을 귀엽고 부드러우면서도 느낌이 여실한 이미지로 만들어 전달해준다. 여려 차례 동물만화와 세태풍자 그림책을 함께 내면서 서로 손발이 잘 맞고 나름의 두터운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희한한 형제들이다.

영장류 긴팔원숭이 생태연구로 인간에의 이해 깊어져

그러나 실제로 그가 떠나던 날 뉴스는 없었고 김산하는 노트북이 든 무거운 배낭을 지고 2007년 조용히 열대우림을 향해 떠났다.

유학길 보다는 열대 우림을, 동물학자들끼리의 교감과 토론보다는 야생 영장류와 영롱한 눈빛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가며 폭우와 안개가 가득한 깊은 밀림속에 몸을 던지는 쪽을 좋아하는 젊은 학자라는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의 주목과 사랑을 받아왔다. 제인 구달이 평생 침팬지를 연구하며 살고 그들과 교감하며 깊은 가족애를 가지고 살아왔듯이 그도 아직 연구자가 없는 인도네시아의 긴팔원숭이 무리를 따라 밀림을 달리고 때로는 함께, 때로는 숨바꼭질을 하듯 뒤를 쫓으며 2년의 세월을 보냈다.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난다. 한발 앞서 불어온 바람에 긴박한 소식이 실려 있다. 공백도 잠시, 작품의 서곡처럼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내린다.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진다. 적시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검은 흙은 넘쳐흐르는 물을 담다가 그만 벅차 포기하고 하염없이 흘려보낸다. 몸부림처럼 땅을 파고든 뿌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을 들이마신다. 왕성한 생명활동에 박차가 가해진다. 광합성과 호흡에의 열정이 발산한다. 빛을 향한 생장과 안개로 서로를 뒤덮는 녹음의 축제가 숲의 체온을 상승시킨다. 물은 살아있는 몸을 통과해 수증기가 되어 다시 하늘로 내보내어진다.... 정글, 밀림, 열대우림., 이것이 바로 비숲이다. 나는 비숲에 살았다."

그냥 비다. 밀림 속에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그는 긴팔원숭이들을 쫓아다니다 그 비를 맞고 그 속에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글은 동물학자의 영장류 관찰연구 기록이 아니라 장엄한 자연의 서사시와 같다.

읽는 사람을 마치 액션 드라마처럼 끝까지 사로잡아 이끌어간다. 실제로 그는 야생의 동물을 '한편의 시적인 존재'로 정의하기도 했다.

"나도 긴팔을 뻗어 인간과 자연 모두와 닿고 싶다"

그의 긴팔원숭이 연구는 뒤늦게 TV에 소개될 기회를 얻었다. "지구촌네트워크 한국인"이란 프로그램의 PD와 무거운 카메라를 나눠지고 정글의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오랫동안 닦아 놓은 숲속의 길과 탐험의 노하우를 공개했다.

"문명과 단절된 채로 살다가 느닷없이 문명의 눈초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지극히 혼자였던 나의 이야기가 고국의 다수에게 전해진다는 그 엄청난 비약이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그 중간 세계에 머물면서 '긴팔을 뻗어'인간과 자연 모두와 닿고 싶다. 일생의 선물 같은 이 시간을 떠올리며 글을 쓸 때면 늘 차오르는 생각이다. 홀로 됨과 나눔의 사이에서."

원주민 연구보조원들과 팀을 짜서 ABCD로 나눈 여러 그룹의 긴팔원숭이를 ?는 일에는 죽음의 위험과 큰 고생이 따르기도 한다.

책의 11장 '고생'편에서는 하늘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정글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끝없는 부상에 시달려야하는 영장류 학자의 '사서하는 고생'이 소개된다.

긴팔원숭이들을 추적하다 급경사의 가시밭 양탄자에서 넘어져 일순간 가시덤불을 온몸으로 껴안은 적도 있다. 달리다가 맨손으로 고꾸라져 중세무기처럼 생긴 그 가시덩어리를 손으로 잡으면 "그로 인한 물리적 아픔보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물체를 내 피부로 감쌌다는 사실이 순간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과 미칠 듯한 가려움증, 상처에 덤비는 모기와 쇠파리와 거머리들, 거대한 송충이와의 싸움도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후덥지근한 밀림 한 복판에서 늪에 빠져 서서히 가라앉아가면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저자의 모습은 30대 청년의 내공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동물박사, 곤충소년 등 자연의 대상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도 순수함과 의미추구, 애정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저자는 강의,연구등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근처에 녹지공간이 있고 집 앞에 손바닥만한 텃밭이 있는 곳에서 채소를 가꾸며 살고 있다.

이 책의 재미와 흡인력 속에서 독자는 저자와 함께 자연스럽게 녹색인간이 되어갈 것 같다.

차미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