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만사] ‘아차산 도사’ 향토사학자 김민수_아차산 돌무지에서 찾은 고대사 연구 비밀 열쇠

2016-07-09 00:06:46 게재

 좋은 기(氣)를 품고 있는 아차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앞 다퉈 차지하려했던 요충지다. 때문에 아차산은 고대사 연구의 보물창고다. 고대로 가는 타임머신 비밀의 문을 연 이가 김민수 향토사학자다. 아차산에 난 산불이 인연이 돼 시작된 그의 역사 연구 열정은 27년째 활활 타오르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 안 한 평 남짓한 향토자료실. 삼국사기, 고조선사, 일본서기, 병서까지 온갖 사료들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다. 책 갈피 마다 주인장의 손때 묻은 포스트잇 색인들이 수북하다.  
 요즘엔 6세기 중엽 백제, 신라의 영토 교환에 관한 논문을 쓰느라 씨름중이라는 김 선생은 일흔을 앞두고 있지만 눈빛이 형형하고 목소리 또한 다부지다.
 1990년에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 첫 논문을 시작으로 한강을 둘러싼 삼국 관계, 백제의 위례성과 북한산성, 아차산과 고대사 같은 묵직한 주제의 논문들을 학회에 줄기차게 발표하고 있다.


‘나는 향토사학자다’
 스스로를 향토사학자로 칭하는 그의 프라이드는 꼿꼿하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강단사학자들,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재야사학자들이 있다면 나는 향토사학자입니다. 유적지와 유물 발굴현장을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와 기존 문헌들을 비교 대조하며 연구합니다.”
 끈질기게 파고든 연구 결과는 납득할 만한 근거, 보편타당한 논리를 갖춘 ‘논문’ 포맷에 담아 세상에 공개한다. 학자들과 학문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일반인들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아차산역사해설사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차산에서 전사한 고구려 온달장군 이야기부터 고구려 장수왕, 신라 진흥왕 등 아차산과 한강을 둘러싼 삼국시대 각축전을 실감나게 들려준다.
 2년 전 나는 김 선생이 진행하는 아차산역사문화투어에 동행한 적이 있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10여명의 답사단을 이끌고 산성, 보루, 온달장군 주먹바위를 누비며 삼국시대 역학관계를 술술 풀어내던 모습이 강렬했다. 우리 고대사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그의 말투, 표정 속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차산 산불 끄다 고구려 유적 첫 발견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은 ‘역사’와 인연이 없었다. 제주 출신의 김 선생은 고대 국문과 졸업 후 고향에서 교사가 됐다. 허나 교직에 갑갑증을 느끼자 사표를 내고 사업을 시작했다. 공병대에서 군 생활 하며 갈고 닦은 토목, 시공 기술에 특유의 철두철미함이 더해지자 사업은 번창했고 돈도 꽤 벌었다. 두 아들 키우는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다 1989년 늦여름 그의 인생에 아차산이 갑자기 쑥 밀고 들어왔다. 산불이 크게 나 진화작업에 동원됐다가 예사롭지 않은 돌무지 더미를 발견했다. 아차산성일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홀린 사람처럼 산 일대를 뒤지자 보루성, 무너진 석탑의 석재들, 절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길로 구청, 서울시청, 중앙박물관, 문화재관리국에 알렸다. 허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애가 탄 그는 밤새서 삼국사기 같은 사료 찾아 읽으며 아차산에서 고대사의 흔적을 차근차근 찾았다.
 유적과 유물을 발견한 지점을 지도로 그리고 사진까지 첨부해 학계, 문화재 관련 기관에 배포했다. 남한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첫 병영 유적이다 보니 학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했고 발굴조사가 드디어 시작됐다.

아차산 돌무지 발굴 인연으로 27년째 고대사 연구중
 운명처럼 김 선생 역시 고대사 공부에 빠져들었다. 생업은 뒷전이었다. “역사 연구는 책상물림 공부가 아니라 직접 보는 게 젤로 중요해요. 현장을 샅샅이 답사하며 지형, 지물을 살피며 객관적인 데이터를 축적해야 하지요. 여기에 인문지리, 외교, 전쟁사까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공부가 끝이 없어요. 특히 고대사는 중국사, 일본사까지 공부해야 윤곽이 잡혀요.”
 아차산을 시작으로 한탄강 일대를 훑었고 점차 전국 단위로 답사 범위를 넓혔다. 중국, 일본도 수차례 다녀왔다. 연구하다 막히는 부분은 박물관 학예연구사나 교수들 찾아다니며 묻고 또 물었다. 학자들 역시 생생한 현장 사진, 귀한 탁본 자료를 만날 수 있어 반색을 하며 그를 반겼다.
  비전공자인데다 주류 학계에 속해있지 않는 탓에 돈키호테 취급 받으며 설움과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27년째 한결 같이 파고든 덕분에 이제는 ‘고대사 전문가 김민수’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자료 얻으러 신진 학자, 재야사학자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슬며시 덧붙인다.
 그가 진행하는 아차산역사해설에 참여했다 개별적으로 찾아오는 일반인들도 꽤 많다고. “나이 들수록 ‘뿌리’에 관심이 생겨요. 퇴직 임원, 고위공직자 가운데 뒤늦게 역사 공부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저것 물어보러 나를 많이 찾아오죠.”
 그는 역사를 파고들수록 우리 고대사에 오류가 많다고 안타까워한다. “백제 계백장군 스토리는 신라에 의해 조작된 내용이며 신라가 백제를 칠 때 육로가 아니라 수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돼요. 객관적인 증거를 다 댈 수 있어요. 앞으로 우리 고대사 계보의 뼈대를 만드는 게 남은 숙제입니다.”
 아차산에 미쳐 고대사에 빠져 사는 그를 이젠 가족들도 지지해 준다고 빙긋 웃는다. 공명심으로 시작해 의무감 때문에 계속하다 이제는 역사연구가 숙명처럼 업(業)이 돼버렸다고 호탕하게 웃는 그는 별명 그대로 ‘아차산 산신령’이었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내일신문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