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호의 미국, 사우디를 겨냥할까

2017-01-11 11:08:29 게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가 '위대한 미국의 재건'을 만방에 선포할 수 있으려면 제국주의적 약탈품을 본국으로 들여와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어디서 그같은 약탈을 자행할 것인가이다. 전 세계 총부채는 각국 국내총생산(GDP)의 300% 수준이다. 파산위기에 몰린 나라가 또 다른 파산위기국을 털어봤자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 빚이 적거나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자랑하는 러시아나 중국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러시아나 중국을 건드릴 경우 어떤 보복이 돌아올지 모른다. 상대적으로 이란이 쉬워보일 수 있다. 트럼프는 당선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주도한 이란 핵합의를 거세게 비난하며 협의 무효화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란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26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이란은 이집트에서 인도, 중앙아시아, 오늘날의 터키에 이르는 거대 제국을 건설했던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이자, 상업거래와 관련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는 나라다. 게다가 미국이 벌이는 게임의 전략을 훤히 꿰뚫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이란은 현재 긴밀한 삼각연대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으로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대적하기엔 중국과 러시아 이란의 삼각편대는 너무 강한 상대다.

경우의 수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페르시아만 군주제국인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는 누가 보더라도 먹음직한 사냥감이다. 물론 사우디는 미국의 사실상 보호국이다. 1945년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압둘라지즈 사우드 사우디 국왕과의 협약을 통해 사우디의 체제보장을 약속한 이래 미국과 사우디는 최근까지 굳은 동맹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남북전쟁 전 남부만큼 미국적인 곳은 없었지만 북부는 남부를 점령했다. 게다가 2001년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9·11 테러사건의 배후가 사우디였다는 사실이 해제된 기밀문서에서 드러났으며, 전 세계에 창궐하는 이슬람 테러의 자금줄 역시 사우디라는 사실을 미국이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정황이 위키리크스 폭로로 밝혀졌다.

미국이 사우디를 사냥감으로 규정하는 데 필요한 건 외교정책의 변화를 선언하는 단 한마디 말이면 족하다. "사우디는 나쁜 나라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점에 매우 실망하고 있다."

하지만 사우디를 사냥감으로 삼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바로 속도전이다. 사우디는 여전히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자랑하지만 급속도로 그 규모가 줄고 있다. 강압적 체제 유지를 위해 국민들에게 이런저런 형태의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우디는 여전히 막대한 유전을 보유하고 있지만 적정량 이상으로 석유를 뽑아올리며 매장량의 고갈 우려를 높이고 있다. 산유국들이 석유수출로 번 돈을 경제성장에 쓰지만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에너지 소비가 커지면서 더 많은 석유를 뽑아올려야 하는 난제에 직면한다는 '산유국 딜레마'다. 따라서 석유산업을 보호하면서 사우디의 정치경제 체제를 흔드는 게 관건이다.

미국으로서 가장 반가운 점은, 사우디가 군침을 흘릴 만한 표적임에도 매우 쉬운 사냥감이라는 점이다. 사우디의 우민화 교육은 익히 알려진 바다. 교육제도는 국민들이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과 관련 문헌을 암송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성적이고 비판적이며 독립적인 지성인을 양성하는 고등교육에는 별 관심이 없다. 또 사우디경제는 외국인 노동자에 의해 굴러간다. 사우디인들은 힘들여 일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쉽게 쫓겨나고 쉽게 들어온다. 따라서 외부세력이 사우디 경제를 쥐고 흔들기에 적합하다. 마지막으로 형편 없는 수준의 국방력이다. 단적인 예가 예멘 내전이다. 사우디는 수년째 막대한 자금과 장비 지원을 통해 예멘 정부군을 돕고 있지만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가 사들이는 고가의 무기는 모두 미국산이지만, 계약업체가 부품조달이나 서비스지원을 끊으면 곧바로 무용지물이 될 정도다.

하지만 이같이 극적인 외교정책 변화를 어떤 논리로 합리화할 것인가. 바로 '테러와의 전쟁'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시작했고, 싫든 좋든 오바마 대통령이 이어받았다. 트럼프는 테러와의 전쟁 성과가 '재앙'이라고 선언하며 이를 폐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적극 활용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 글로벌 테러리즘의 온상지는 그동안 미국이 공격했던 나라들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이었던 사우디였다고, 있는 그대로 설명하면 된다. 사우디 건국이념의 기초이자 이슬람 부흥운동의 효시인 '와하비즘'은 전 세계 곳곳에서 테러리즘을 조장하고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는 이데올로기다. 1999년 러시아 체첸반군의 테러나 2008년 중국 신장 위구르 테러 등의 배후에도 와하비즘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결론이다. 이는 미국이 사우디의 힘을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이해를 얻기가 쉬워진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란은 동참하는 정도가 아니라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그렇다고 사우디를 힘으로만 제압하는 건 무리가 따른다. 미국은 좀더 부드러운 방법을 쓸 수 있다. 그동안 미국이 용인한 사우디의 특별대우를 해제하면 된다. 미국은 그동안 싫어하는 나라들에게 △여성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라 △이슬람 이외의 종교인이나 무종교인에도 자유를 주라 △서로 다른 종교인들 사이의 결혼을 허용하라 △헌법에 기초해 통치하고 대의제 민주주의를 도입하라는 등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이를 사우디에 적용하면 된다.

시작은 부드럽지만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저항하는 사우디 내에서 폭탄테러나 반란, 시위가 일어날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모두 사우디를 떠날 것이다. 사우디 경제가 마비되면서 석유산업은 외국 통제 하에 들어가고, 자산은 강제수용된다. 역사상 여러 차례 되풀이된 낯익은 '위대한 미국의 재건' 과정이다.

현재 사우디엔 여전히 많은 석유와 돈, 모래가 있다. 하지만 돈과 석유는 급속도로 소진되고 있다. 지금처럼 10년이 지속된다면 사우디에 남는 건 모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은 사막의 모래왕국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그 상황을 끝내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자처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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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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