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현상은 시장-국가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
불평등이 심화하고 중산층 소득이 줄어드는 게 미국 포퓰리즘적 반란의 주요 원인이라면, 트럼프주의가 결국 이를 악화시킬지언정 완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조셉 스티글리츠는 "분배측면에서 최하위계층이 받는 실질임금(물가상승률 고려) 수준은 약 60년 전과 동일하다"며 "따라서 트럼프가 '미 경제는 썩었다'고 외칠 때 대중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한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과거 60년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은 '글로벌화의 핵심 가치인 무역과 금융자유화가 모두에게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따라서 삶의 질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하락한 대다수 유권자들이 '미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거나 아니면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는 건 당연하다.
그는 트럼프의 딜레마 역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즉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분노를 기반으로 대통령에 올랐지만 그의 정책 역시 대중의 박탈감을 달래주기 힘들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트럼프가 세금 감면 등을 통해 부유층과 기업에 혜택을 주면 낙수효과가 일어나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전 정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낙수효과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 신경제사고연구소(INET) 소장인 로버트 존슨도 부와 권력의 불평등 심화로 고통받는 유권자들이 조만간 트럼프에 대한 미몽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가 보기에 대선 기간 동안 트럼프와 민주당 후보 버니 샌더스만 유권자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문제를 직시했다. 바로 선출직 공무원이란 모든 이들에게 번영을 가져다주는 정치경제적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는 것.
존슨은 "트럼프와 샌더스를 제외한 기타 후보들은 미국 사회 내 극소수 부유층에 비굴하게 아부하지 않고서는 선거비용을 대기조차 어려운 시스템에 갇혀 있었다"며 "이들은 유권자들의 진짜 문제를 직시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어 "이같은 미국의 현재 정치시스템이 트럼프 반란을 부른 원인"이라며 "스스로 선거비용을 댄 트럼프와 풀뿌리 자치조직을 통해 십시일반 선거자금을 댄 샌더스가 여타 후보를 제칠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
트럼프 승리동력, 오히려 '독' 된다
그렇다면 대통령에 취임한 트럼프는 이제 대선 기간 공약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실행가능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가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트럼프 역시 자신이 적으로 규정한 동일한 '조작' 시스템에서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고약한 딜레마다. 트럼프는 대규모 재정 확장 정책을 통해 미 국민을 부유하게 만들고자 하지만, 결국 낙수효과는 간데 없이 소수 부유층에게 과도한 혜택이 주어지는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당연히 대중의 각성된 분노가 분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산층 유권자가 전통 정당정치를 거부하고 트럼프 품에 안긴 주된 이유가 단지 소득불평등이 아니라면 어떨까. 하버드대 정치철학자이자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미국 유권자들의 분노는 단지 임금과 일자리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존중과 관련한 문제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컬럼비아대 교수인 에드먼드 펠프스는 샌델의 가정을 지지하는 자료를 제시한다. 1970년 이후 임금에 각종 혜택을 더한 '총노동보수' 성장세는 나라 전체의 총이익 성장세보다 더뎠다. 소득측면에서 최하위층의 평균 임금인상률은 중산층과 비교해 더디지 않았다. 반면 생산직이면서 비관리직에 있는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다른 모든 부문 노동자보다 크게 낮았다. 결국 중간 보수를 받는 생산직-비관리직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들은 또 노동력에서 가장 빨리 낙오된 집단이자 질병과 자살, 약물중독에 빠지는 비율이 가장 높은 집단이다. 펠프스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사회적 동질체라는 느낌을 잃고 있다"며 "또 무언가에 성공했다는 만족감을 얻지 못하고 자족적인 직업을 통해 스스로 성장할 공간을 잃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들은 아이오와와 미시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등 러스트벨트 산업지역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원동력이었다. 펠프스는 "이 지역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기회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미국 제조업의 생산성 성장이 뒷받침돼야만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규제완화만으로는 부족하고 경쟁을 통한 혁신성이 높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고, 현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업들을 협박하며, 대기업에게 초점을 맞춰 과감하게 세금을 깎아주는 트럼프식 정책으로는 혁신을 살리기보다 죽이게 된다는 게 문제점이다.
프랑스 국책연구기관인 '스트라테지' 소장인 장 피사니-페리도 비슷한 결론을 내놓는다. 그는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걸기보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는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전반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경제성장의 정체 △소득 불평등의 심화 △블루칼라 일자리를 없애는 기술진보 외에 △공간적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고학력 전문직을 가진 성공한 사람들은 끼리끼리 결혼하고 대도시 번화가에 모여 산다. 낙오한 사람들 역시 끼리끼리 결혼하고 지방소도시나 낙후지역에 모여 산다. 트럼프가 승리한 도시의 GDP는 전체의 36%에 불과한 반면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승리한 도시의 GDP는 64%에 달했다. 공간적 불평등은 미래를 낙관하기 힘든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건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마법이다.
피사니-페리는 "사회경제적 문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시경제적 △교육적 △분배적 △공간적 해법이 동시에 추구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트럼프가 내놓은 정책을 보면 이들 중 하나만이라도 성취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아니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 트럼프는 복지정책의 축소는 없다고 말했지만, 상하 양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이미 복지제도 수술에 돌입했다. 대체입법 없이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의료보험을 폐지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미 의회예산국은 오바마케어 폐지 첫해에만 약 1800만명의 미국인이 보험혜택을 박탈당할 것으로 추산했다.
자본주의, 어디로 향할 것인가
트럼프의 당선과 그의 임기가 현 시대 경제적 사고방식과 자본주의 미래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 펠프스는 암울한 진단을 내놓는다. 그는 "미국의 혁신성이 정체되거나 줄어들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후반"이라며 "행정부 곳곳에 코퍼러티즘(협동조합주의, 자본과 노동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통제)이 스며들면서 미국은 혁신의 아이콘에서 이탈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실리콘밸리가 새로운 산업 부문을 창조하면서 잠시나마 혁신의 속도를 높였지만, 이제는 실리콘밸리 역시 수익급감에 직면해 허둥지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펠프스의 해법은 자본주의의 기반인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를 회복하고 혁신성을 되살려 상상하고 탐구하고 실험하고 창조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가 보기에 트럼프의 정책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그는 "트럼프는 혁신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그의 측근들은 혁신성을 저해할 수 있는 위험한 정책, 즉 정부개입을 늘리고 무역과 경쟁을 억제하며 193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이후 거의 사라졌던 코퍼러티즘 경제정책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아나톨 칼레츠키는 펠프스보다는 낙관적이다. 자본주의 역사의 흐름에서 살펴볼 때 트럼프 현상은 반드시 겪어야 할 필연적 산통이기 때문이라는 것. 칼레츠키는 "자본주의는 일종의 진화시스템으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경제적 관계와 정치적 제도를 신속히 전환하면서 체제를 존속시켰다"며 "오늘날 포퓰리즘 득세가 정치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위기 전 매뉴얼을 찢어버리라,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혁명적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트럼프가 상징하는 것은, 냉전 이후 한 세대 동안 전 세계를 호령하던 지배적 경제 사고방식에 대한 전면 거부다. 따라서 새로운 경제적 사고방식을 도출해내는 일이 향후 경제학자와 정치인들이 맞닥뜨릴 가장 큰 도전과제다. 칼레츠키는 "자본주의 출현 이후 체제 변곡점마다 정치와 경제 사이의 경계선이 변했고, 시장 자율과 정부 개입 간 비중이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전 외무장관이었던 윤영관 서울대 교수도 비슷한 입장이다. 윤 교수는 브렉시트 찬성 가결 직후인 지난해 6월 30일 프로젝트신디케이트 기고문에서 "우리는 거대한 정치적 공백 상황에 놓여 있다"며 "물밑에서 시장과 국가의 관계에 근본적 전환이 이뤄지는 가운데 수면 위에서는 포퓰리즘과 민족주의, 외국인혐오증 등이 현상이 부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시장과 국가라는 양자를 화해시키는 게 오늘날 정치경제 측면에서 중심 이슈"라며 "18~19세기 애덤 스미스나 프리드리히 리스트, 카를 마르크스의 평생을 건 지적작업들, 20세기 중반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정부의 역할과 개입을 놓고 벌인 대 논쟁과 궤를 같이 하는 흐름"이라고 진단했다.
칼레츠키는 "트럼프 현상은 단지 이같은 거대한 흐름에서 불거진 가장 격한 형태의 증상"이라며 "윤 교수가 제대로 지적했듯, 국가-시장 관계가 건강한 균형상태를 되찾을 때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사회정치적 불만이 지속 분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칼레츠키는 "트럼프 현상과 유럽 등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상황에 직면해, 전 세계는 자본주의의 다음 국면에서 시장과 정부 간 관계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며 "트럼프 행정부 임기 4년 동안 미국이 그 해답을 주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정부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 무언지는 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