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규식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태극기로 하나됐던 우린데, 성조기 등장해 둘로 갈라져"

2017-02-28 11:06:43 게재

"민족의 하나됨-주권재민-정의와 인도가 3.1운동 핵심"

"민주구국선언, 6월항쟁, 촛불항쟁에서 3.1정신 재현돼"

"상생의 대한민국, 공공성의 회복이 발전적 계승의 길"

"3.1운동 정신의 키워드는 민족의 하나됨, 주권재민, 정의·인도 3가지라고 봅니다. 민족의 하나됨이란 한국사람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결집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3.1운동이었다는 거지요. 그 전에도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식이 있었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주인과 노비 사이에 한 동포 자매라는 공감대가 있었겠어요.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해체되고, 3.1운동에 이르러 남녀노소 지역계층에 상관없이 모두가 조선 독립을 외치며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겁니다."

사진 장규식 교수 제공

장규식(53)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3.1운동 100주년이 2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3.1정신의 발전적 계승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27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3.1운동 100주년을 어떻게 맞을지 논의하기 위해 개최한 토론회에 참석한 장 교수를 만나 3.1운동의 의미를 물어 봤다.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한 장 교수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 지성사의 구도와 궤적을 꾸준히 추적해 온 연구자로 손꼽힌다.

3.1정신의 다른 키워드도 설명해 주시죠.

둘째로 주권재민인데요.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한 직후 미국에서 발행되던 교포신문 '신한민보'에 '형질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그 날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본이 아니라 인민에게 넘어간 것이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민국 건설의 시발점이라는 주장인데요. 바로 이러한 민국 건설의 비전이 있었기에 애국지사들이 망국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의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겁니다. 3.1운동 직후 상해에 설립한 임시정부의 이름이 '대한민국'으로 정해진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지요.

정의 인도를 3.1정신의 세 번째 키워드로 보셨는데.

3.1독립선언서를 보면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來)하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위력의 시대란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를 인간사회의 기본법칙으로 받아들인 시대를 말합니다. 힘이 약해서 일본에 먹혔으니 어쩔 수 없다 이런 거죠. 그런데 독립선언서에서는 약육강식의 원리에 기초한 위력의 시대가 1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종말을 고하고, 이제 인도와 정의에 기초한 도의의 시대가 온다고 선언합니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전망한 겁니다.

3.1정신은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계승됐습니까.

한국현대사 저변에는 언제나 3.1정신이 자리해 있었습니다. 특별히 세 사건을 꼽자면 1965년 6월에 조인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구국기도회를 개최하며 투쟁을 이끈 함석헌, 한경직, 김재준 등 교계 지도자들은 이를 '3.1정신의 재현'으로 평가했는데, 유신체제하 기독교계의 민주화 인권운동은 바로 여기서 발원한 거죠.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1976년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3.1민주구국선언입니다. 문익환 목사가 기초한 이 선언에서 함석헌, 김대중 등 서명자들은 민주회복, 노동자인권, 민족통일을 제창합니다. 3.1정신의 현대적 계승 그 자체였죠.

그 다음이 1987년 6월항쟁인데요. 3.1운동 당시 민족 독립을 외치며 하나 되어 어깨를 건 감격이 6월의 광장에서 민주화를 외치며 재현됐습니다.

지난해부터 대규모로 지속되고 있는 촛불집회는 어떻습니까.

촛불항쟁 역시 3.1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3.1운동, 6월항쟁, 촛불항쟁을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진화의 과정으로 보는데요. 광장에서 하나가 되는 연대의 경험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사실 6월항쟁 당시만 해도 군사독재의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상황에서 광장의 분위기는 비장할 수밖에 없었죠. '강철 대오' 같은 구호 속에서 개인이 설 자리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고요.

그런데 촛불광장에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소통을 해요. 촛불집회에서 오래전 친구들이 재상봉모임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혁명과 축제의 공존이랄까, 즐기는 투쟁이랄까. 아무튼 즐기는 놈만큼 무서운 놈 없다고 하잖아요.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집회인데.

우리 역사 속에서 3.1정신이 훼손된 부분도 있지 않나요.

먼저 하나 됨의 정신은 분단과 전쟁을 통해 결정적으로 훼손됐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통해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냉전 논리가 기승을 부려 남한사회마저 좌우로 갈려 다투는 파행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잖아요. 3.1운동 때 태극기 흔들며 하나가 되었던 우리인데 난데없이 성조기가 등장해 둘로 가르는 일이 왜 벌어져야 하죠?

주권재민의 원칙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를 겪으며 크게 훼손됐습니다. 이번 국정농단 사건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고요.

그리고 인도와 정의의 원칙은 재벌중심의 압축적 경제성장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많이 훼손됐습니다. 노동자 농민 서민 등 약자의 인권과 민생이 개발의 뒤안길에서 유린되기 일쑤였으니까요.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탄식이 나오는 세상이 된 거죠.

3.1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방법을 제안하신다면.

먼저 남북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집회를 통해 지펴진 광장 민주주의의 동력을 제도적 민주화를 넘어선 실질적 민주화로 연결시켜 자리 잡게 해야 하고요. 그렇게 해서 소수자 인권이 보장되는 함께 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래저래 시민사회 공공성의 회복이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부추기는 약탈적 경제질서, 협동을 도외시한 경쟁지상주의, 상대평가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창조는 경쟁이 아니라 여백에서, 내가 몇 등 했냐가 아니라 무엇을 성취했냐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끝으로 민영화라는 말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과거 관과 민이 대립했던 권위주의 시절에 민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제도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민영화는 재벌의 사유화, 경제독점으로 귀결됐어요. 민간이라는 범주 안에 공(公)과 사(私)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은 때문이죠. 멸사봉공의 전체주의적 사고는 아주 위험하지만 선공후사의 정신으로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안녕을 함께 추구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 서야 실질적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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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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