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윗선 향하는 '사법농단' 검찰수사
'문건삭제 지시' 이규진 전 양형위원 조사
검찰 "지휘고하 막론하고 책임 물을 것"
헌재 정보유출 최 판사, 이 위원 지시 부인 안해
'사법농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사법부 윗선을 향하고 있다. 검찰은 23일 오전 10시부터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고 있는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를 벌이고 있다. 차관급 판사가 조사를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 조사가 본격적으로 '사법농단'을 지시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법부 윗선을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법조계 일각의 의견이다.
검찰 관계자는 23일 내일신문과의 통화에서 "(사법농단) 책임의 범위를 확정하는 수사다. 사실이 나오면 당연히 신분의 지위고하가 없다"고 밝혔다. 이 전 위원의 혐의가 방대해 조사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오전 9시 40분 검찰청사에 도착한 이 전 위원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만으로도 한없이 참담하고 부끄럽다. 검찰에서 사실대로 진술하겠다"고 말하고 조사실로 들어갔다.
이 전 위원은 판사 사찰 문건의 삭제 등을 지시한 의혹 등을 받고 있다. 최근 검찰 조사를 받은 김민수 부장판사는 지난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근무하다 자리를 옮기기 직전 법원행정처 파일 2만 4000여개를 삭제한 사실이 법원 자체 조사 결과 드러났다. 김 판사는 최근 검찰 조사에서 파일 삭제에 이 전 위원의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다른 판사들에게도 비슷한 취지의 진술을 확보했다. 검찰은 이 전 위원이 상부의 지시를 받아 조직적으로 '사법농단' 사건의 증거인멸을 시도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이 전 위원은 이현숙 전 통합진보당 전북도의원이 2015년 제기한 지방의원 지위확인 소송에서 재판부의 심증을 미리 빼내는 한편 선고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요구한 의혹도 받고 있다.
검찰은 이 전 위원이 헌법재판소에 파견됐던 최모 판사가 헌재의 중요 정보를 법원행정처로 빼돌리는데 관여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검찰 조사 결과 2015년부터 올해 2월까지 헌재에 파견됐던 최 판사는 박한철 전 헌재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과 관련해 지시한 비공개 발언 뿐 아니라, 박정희정부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패소시킨 판결 등에 대한 검토 보고서 등을 법원행정처에 이메일로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22일 헌재 중요정보를 빼낸 혐의(공무상 비밀누설) 등을 받고 있는 최 판사를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검찰 조사에서 최 판사는 헌재 정보를 빼내는데 이 전 위원의 지시가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 전 위원을 상대로 문건 삭제 등에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지시가 있었는지 여부를 집중 추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신봉수 부장검사)와 특수3부(양석조 부장검사)는 20일 이 전 위원의 사무실(서울고등법원), 주거지와 최모 전 헌재파견 판사의 사무실(서울중앙지법) 등을 압수수색해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 관련 증거를 확보했다. 이 전 위원은 현재 직무배제 상태다.
검찰은 이 전 위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구속영장 청구도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법농단' 수사에서 압수수색 영장이 대부분 기각된 점에 비추어 법원이 이 전 위원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한 것은 검찰이 대부분 혐의를 소명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 윗선까지 수사가 확대되면서 임 전 차장 등과 전직 대법관들에 대한 검찰 조사가 멀지 않았다는 전망이다. 검찰 관계자는 최근 "대법관이라고 해서 필요한 수사를 안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조만간 소환할 가능성을 내비췄다. 검찰은 양 전 원장 시절 대법관을 지낸 고영한 박병대 차한성 전 대법관을 '사법농단의 피의자'로 규정하고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