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온전히 나였던 책, 다시 숨을 쉬게 되다니”

2018-11-23 11:11:57 게재
허수경 지음 / 난다 / 1만4800원

지난 10월 3일 독일에서 타계한 허수경 시인의 49재에 맞춰 그의 산문집이 15년 만에 재출간됐다. 시인이 1996년에 낸 첫 장편 ‘모래도시’도 역시 시기에 맞춰 다시 나왔다.

2005년 출간됐던 ‘모래도시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산문집은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라는 새 제목과 새 서문을 얻었다. 시인이 암투병 중에도 애정을 담아 덧붙인 개정판 서문은 오래도록 독자들을 놔주지 않는다.

“작년에 화분에 심어둔 수국이 얼어가고 있었다. 내가 얼어가는 동안 수국도 얼 거라는 걸 우리가 같은 계절을 산다는 걸 왜 모른 척했던가.

수국은 나보다 먼저 갈 것이다. 소리 없이 불평 없이. 그리고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언젠간 너를.”

“오래 죽어 있던 책. 온전히 나였던 책. 아프게 썼고, 처절하게 썼고, 무덤을 열고 들어가 나 스스로 죽음이 되어 모래 먼지의 이름으로 썼던 책. 다시 숨을 쉬게 된다니 기적만 같다. 이 기적이 내게도 올까. 온다면, 크리스마스에 벽난로 앞에 앉아 만질 수 있을 텐데. 만지고 싶은데. 될까. 그게.”

1992년 독일로 건너간 시인은 고고학 연구와 글쓰기를 함께 하다 위암 투병을 하다 끝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산문집 속에선 여전히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책 속에서 오리엔트의 폐허 도시 바빌론을 중심으로 고대 건축물 발굴작업에 참여하고 있거나 독일의 집에 잠시 돌아와 상념에 잠겨 있다.

벽돌에 쐐기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새기되 쌓을 때는 그것이 보이지 않도록 아랫면을 향하게 했던 고대의 왕들과 굳이 자신의 이름이 보이게 벽돌을 쌓은 사담 후세인을 비교하며 시인은 인간의 욕망을 생각한다.

아담한 모래언덕처럼 앉아 발굴현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랍의 여인을 보면서는 문득 외로움과 그리움을 떠올린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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