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지정학, 미국 금융패권 위협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스페셜리포트 I
"코로나19 팬데믹, 금융체제 분열 가속"
미국의 실수로 인한 위기에도 달러는 고공행진을 한다. 미국 행정부의 자의적 잣대로 적국, 동맹국 가릴 것 없이 불공정한 제재를 받는다. 글로벌 금융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달러패권은 지속될 것인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최신호 스페셜리포트를 통해 그 답을 찾아나섰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올해 1월 미국의 한 전직 장군은 글로벌은행들의 간부를 모아놓고 진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전략과 군사·경제력 등 하드파워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데 익숙한 그는 '냉전 이후 가장 복잡한 위협이 등장했지만, 미국이 이를 어설프게 다루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란과 러시아, 코로나19 위기 등이다. 하지만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위협도 언급했다. 미국이 경제제재를 마구잡이로 발동하면서 달러패권의 압도적 영향력을 오남용하면서 적국이나 동맹국이나 가릴 것 없이 달러체제를 우회한 별도의 금융기구를 고안하도록 내몰고 있다는 것. 그는 "최고결정자(decider in chief)는 금융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반신반의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전직 장군이 달러 중심의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같은 위협이 얼마나 가시화됐는지를 방증한다"고 전했다.
금융시스템은 은행 등 기관들과 화폐, 결제체제 등으로 구성돼 있다. 눈에 안 보이는 유동성을 전 세계 실물경제로 흘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중심이 됐다. 하지만 반복되는 실수, 중국의 점증하는 영향력 등으로 곳곳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현재의 달러체제가 너무 공고하기에 다른 나라의 도전이 쉽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지는 "더 이상 공고하지 않다"며 "별도의 금융 영역이 신흥국에서 형성되고 있다. 기존과 다른 요소와 다른 주체 등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에 도전하는 상대는 중국이다. 지정학은 물론 금융 측면에서도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중국의 급속 성장은 기존 시스템에서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현재 중국의 비중은 글로벌 GDP의 15.5%다. 2000년 3.6%에서 크게 상승했다. 중국 경제는 세계 2위로, 글로벌 무역 시스템 내에 깊숙이 진입했다.
하지만 금융시스템에선 여전히 경량급이다. 중국은 금융에서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게 진정한 강대국이 되는 길이라고 본다. 영국 안보 싱크탱크인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톰 키팅은 "달러패권이 밑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코로나19 위기가 달러패권에서 벗어나려는 원심력에 결정적 추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달러패권의 첫 번째 기둥은 1944년 세워졌다. 당시 미국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에서 전 세계 금융·경제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을 창설하고 글로벌 통화질서를 정했다. 미국은 2차 대전 동안 동맹국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괴를 획득했다. 전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폐허가 됐다. 1, 2차 대전 사이에 채택한 변동환율제는 제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판명났다. 따라서 모든 통화를 달러에 연계하고, 달러를 금에 연계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로써 달러는 새로운 기축통화가 됐다. 전후 20년 동안 일본과 독일의 경제력이 급증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전비를 대느라 달러를 마구잡이로 찍었다. 때문에 달러와 금의 연동제가 지속불가능해졌다. 금태환이 붕괴했다. 하지만 달러 중심 시스템은 살아남았다.
신기술로 도약한 미국의 금융계
1970년대 미국은 글로벌 지급결제 시스템에도 영향력을 갖게 됐다. 당시 주별 경계를 넘어서 영업할 수 없었던 미국 은행들은 연합해 은행간 정보공유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를 기반으로 미 전역에 ATM(현금자동입출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와 함께 은행들은 돈을 갹출해 신용카드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다 두 곳의 메이저 카드사가 해외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 가장 큰 두 곳의 ATM 운용사를 인수하게 됐다. 별개였던 카드와 ATM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융합됐다. 2곳의 인수자는 곧 비자와 마스터카드로 이름을 바꿨다. 신용카드와 ATM은 전 세계로 송금할 수 있는 금융인프라가 됐다. 이제 개인들은 어디서든 자유롭게 쇼핑할 수 있게 됐다.
곧 거액의 송금을 위한 금융혁명도 뒤따랐다. 기존 '텔렉스'(telex) 체제에서는 은행끼리 국경을 넘어 결제하려면 십여개의 정보를 직접 작성해 교환해야 했다. 당연히 실수가 따랐다. 1973년 은행들이 연합해 '국제은행간 통신협정'(SWIFT)을 만들었다. 모든 은행 지점에 독특한 코드를 할당해 지급·송금업무 등을 위한 데이터통신 교환을 자동화했다. 글로벌 금융계의 공통어가 생긴 셈이었다.
이같은 신기술은 미국 은행들의 위상을 높였다. 곧 해외 고객들을 더 많이 상대하게 됐다. 게다가 자산장부의 디지털화로 자본시장이 급속 성장하게 됐다. 경제재건에 성공, 막대한 저축을 쌓아놓은 일본과 독일이 미국채를 대거 사들였다. 부동산 호황으로 자산담보증권이 싹을 틔웠다. 1980년 미국의 증권가치 총액은 GDP의 105%였지만 2003년엔 3배가 넘었다. 투자은행을 위한 국제적 도약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게다가 1990년대 금융빅뱅이 일어나 규제가 급속히 완화됐다. 덕분에 투자은행들은 상업은행과 잇따라 합병하기 시작했다. 2008년이 되자 35개의 은행들이 빅4로 합종연횡을 이뤘다. 씨티그룹과 웰스파고, JP모간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였다.
글로벌 금융시스템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재난과 재앙이 닥치면, 달러 가치는 치솟는다. 달러는 여전히 전 세계 가장 안전한 가치저장 수단이자 교환의 매개다. 덕분에 달러를 공급하는 연방준비제도(연준)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지휘자 역할을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연준은 부유한 국가들에게 스와프라인을 개설하면서 유동성 고갈 사태를 막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시장이 요동치던 지난 3월엔 주요 신흥국들에게 스와프라인을 열었다. 4월엔 이를 더 확대해 대부분의 국가와 국제기구들이 미국채를 담보로 달러를 빌릴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달러를 향한 무분별한 쇄도는 진정됐다.
글로벌 금융 배관시스템도 미국이 쥐락펴락 한다. 스위프트는 전 세계 1만1000개의 은행을 회원사로 두고 있다. 하루 3000만건의 거래를 중개한다. 국제 금융거래의 대부분은 뉴욕에 위치한 환거래은행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뉴욕어음교환소가 운영하는 'CHIPS'(Clearing House Interbank Payments System, 은행간 지급결제 청산소)에서 결제된다. 하루 평균 1조5000억달러의 지급결제액을 청산한다. 카드업계 정보 소식지인 '닐슨리포트'에 따르면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전 세계 카드 결제의 2/3를 차지한다. 미국 은행들은 전 세계 투자금융 수수료의 52%를 가져간다.
모든 건 바뀌기 마련
3가지 요소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첫째 지정학적 요소다. 미국이라는 금융의 구심점은 경쟁자들을 좌절하게 만든다. 글로벌 유동성 공급에서 제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미국은 그러한 권한을 아꼈다. 글로벌 금융시스템은 중립적인 인프라로 간주됐다. 무역과 경제번영을 촉진하는 역할이었다.
첫 번째 균열은 2001년 이후 나타났다. 미국이 테러집단에게 흘러드는 자금을 막기 시작하면서다. 조직범죄와 핵확산 등이 곧 제재목록에 포함됐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정책보좌관으로, 테러집단에 대한 자금 차단 프로그램을 처음 고안한 주언 저레이트는 "미국은 그같은 집단이 국제안보와 금융시스템 통합에 위협요소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맹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금융 무기화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더 큰 힘을 발휘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이후 미국은 러시아의 신흥재벌과 기업, 경제의 전 부문을 상대로 이전 규모의 2배에 달하는 제재를 단행했다. '세컨더리 제재'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타깃과 거래한 제3국의 기업들을 벌주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세컨더리 제재를 무기로 활용해 동맹까지 겨눴다.
지난해 12월 미국은 러시아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들여오기 위한 송유관 건설 작업에 참여한 유럽 기업들을 제재했다. 올해 3월엔 이란에 대한 제재를 강화했다. 제3국이 이란에 원조 형식으로 지원한 것까지 문제 삼았다. 국제사회에서 그같은 무기는 공평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2008년 이후 미국은 전 세계 각국에 금융제재 벌금 290억달러를 물렸다. 이 가운데 유럽 은행들을 대상으로만 220억달러 벌금을 때렸다. 미국 대형로펌 '깁슨 던'의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이 새롭게 제재 대상에 올린 건수는 82차례나 됐다.
경제제재는 이제 중국을 목죄기 위한 목적에서 급증하고 있다. 미 상무부가 대표로 나섰다. 상무부는 특정 증거 없이도 의심스럽다고 여기는 자체만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한다. 이 기업들에게는 수출할 수 없다. 2016년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은 51개였지만 올 3월 기준 159개로 늘었다. 새로 늘어난 리스트 중 중국 기업이 2/3를 차지한다. 상무부뿐 아니라 다른 부처 역시 중국에 강하게 맞서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조치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단기적으로 보면 금융제재 시스템의 불명확한 특성이 제재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른다. 전 세계 각국이 우회로를 찾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달러 대체 시스템에 필요한 도구들이 속속 제공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달러 체제 반란을 위한 두 번째 요인을 낳는다. 신흥국의 자체 필요성이다. 신흥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23억인구는 기존 금융서비스 접근이 어렵다. 기술기업들은 풍부한 자본과 관대한 규정 등에 도움을 받아 저렴하게 운용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을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가 희소하고 모바일폰이 일반적인 지역에서 특히 상거래를 북돋우는 목적을 갖고 있다. 거대한 안방시장의 지원을 발판으로 한 중국의 앱 개발자들은 이용자가 통용화폐 없이도 소비할 수 있는 상거래 생태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뿐 아니라 많은 신흥국들도 '리밸런싱'을 원한다. 대부분 신흥국들은 해외에서 돈을 빌린다. 그리고 수출가격은 달러로 표시된다. 미국은 한때 신흥국 상품의 최대 구매국이었다. 따라서 달러가치가 오를 때 미국의 신흥국 상품 수요도 뒤따라 상승할 것이었다. 그러면 신흥국이 달러빚 내는 비용을 보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신흥국들의 최고 교역국은 중국이다. 달러 강세는 중국의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하락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흥국이 달러 빚을 갚는 것이 더 비싸지는 반면 중국의 신흥국 상품 수요는 하락한다. 상황은 엄중해졌다. 신흥국의 달러 부채 총액은 2010년 이후 2배 증가해 현재 3조8000억달러에 달한다.
달러 체제 반란을 촉발할 3번째 요소는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이미 관세 폭탄에 절뚝거리는 글로벌 무역은 코로나19로 큰 상처를 입을 전망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마련한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역내 물품 부족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때문에 각국 정부는 공급망의 거리와 범위를 좁히길 원한다. 이는 중국과 같은 강대국들이 역내 자국의 규정을 관철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은 코로나19 위기에 이미 2조7000억달러 부양조치를 쏟아냈다. 당연히 국제사회는 미국이 과연 빚을 갚을 수 있을지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 정부에 대한 신뢰는 미국채와 달러의 존재 기반이다.
가장 중요한 건, 코로나19 위기가 미국의 글로벌 지도력에 거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초기 신호를 무시했고 초기 대응에서 잇따라 실수했다. 중국은 자체적인 실수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전 세계에 수출했다는 더 큰 혐의를 받기는 하지만 신속하게 코로나19 위기를 막아내면서 자국의 경쟁력을 안팎에 자랑하고 있다. 글로벌 번영을 보장하던 미국의 능력은 글로벌 금융질서를 공고히 하는 접착제다. 미국의 합법적 지배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으면서,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공격은 불가피해 보인다. 제1선에서 공격을 받아낼 보병들은 바로 미국의 은행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