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2020-06-05 17:13:28 게재

걷는 자의 기쁨/박성기/마인드큐브/1만8000원

걷는 자의 기쁨/박성기/마인드큐브/1만8000원
산이 있어 오르듯 길이 있어 걸었다. 여러 갈래의 길을 앞에 두고 우뚝 서고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 걷는 게 인생이다. 각 갈래의 종착점은 아무도 모른다. 미로처럼 얽혀 수많은 선택의 결과물의 종합판이니까.

도보여행가 박성기씨는 길에서 자신을 찾았다고 했다. 걷고 또 걸으며 ‘나의 길’과 ‘다른사람의 길’을 생각하며 ‘걷는 자의 기쁨’을 엮어냈다. 그는 “내가 살아온 동안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라고 자문하며 “그때부터 길은 나의 동행이 되었다”고 했다. “걸으면서 방물장수가 되고 떠돌이가 되었으며 바람이 되었고 구름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는 툭툭 떨어진 동백꽃과 온 산 가득한 진달래를 모아 객주처럼, 태백산맥처럼, 토지처럼 이야기를 펼쳐내는 이야기꾼이 됐다.

소백과 태백 사이에서 머리를 내미는 봄날을 그렸다. 숲길에 나 있는 그리움의 시간과 애틋한 삶의 정표들을 보부상처럼 짊어진 여름볕으로 노래했다. 그러고는 강렬한 빛과 만난 단풍의 울림을 가을 초대장에 담았다. 얼음과 눈으로 만들어진 순백의 꽃길은 겨울시로 만들어졌다.



해남에서 밀양까지

봄의 길은 해남에서 시작했다. 걷는 이는 전남 해남 달마고도의 40리길에 뿌려진 봄볕을 맞으며 돌아봤다. 숨가쁠 정도로 솟아있는 봉우리는 호남의 끝자락인 달마산의 ‘구도의 길’과 맞닿아있다. 달이 지나갔다는 경북 상주 월류봉 둘레길을 휘휘 돌아 낙타 등처럼 솟아있는 다섯 봉우리는 아찔한 월류정과 만난다.

안동 하회마을과 비견할 만한 경북 경주 양동마을은 과거로의 여행을 부추긴다. 시간을 거꾸로 간 선비촌의 내음이 아직도 고여있다. 저자는 “서백당과 향단 등 고택들을 보면서 우리가 가꾸고 보존해야 할 귀중한 가치가 무엇이지 생각해본다”고 했다.

전북 고창 선운사의 동백은 미당의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를 떠오르게 한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같은 푸르러도 소나무의 푸른빛은 어쩐지 노년의 푸른빛이겠는데 동백나무는 고목일지라도 항시 청춘의 녹색”이라고 했다. 시인들을 붙잡아 놓았던 동백의 낙화는 여지없이 뒤꿈치를 잡는다.

대명항에서 문수산성에 이르는 길은 할머니표 신김치에 탁배기 한잔과 딱 어울리고 충북 영동 양산의 8경 둘레길은 금강의 빛 주름을 감상하기에 제격이다.

생명력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강력한 생의 의지는 경북 울릉도에서 만난 소득이다. 동쪽 끝 독도를 에워싸며 해협을 물들이는 해돋이의 절경은 애국심으로 옮겨붙는다. 경남 밀양의 아리랑고개는 아랑의 전설을 품은채 밀양강을 넘보고 ‘날좀 보라’는 밀양아리랑 한 곡조를 뿌려낸다.

길도 잃고 시름도 잃었다

강원 정선 덕산기 계곡은 여름을 기다렸다는 듯 짙은 녹음과 물소리로 안아버린다. 머리끝까지 아찔하게 만드는 차가운 냉기는 온몸을 한번 털고서야 이생임을 확인하게 한다. 강원 인재에서 시작해 고성 마장터로 넘어가는 숲길은 보부상이 넘나든 경로다. 진부령과 미시령 길이 생기기 전 인제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었다. 경북 울진 십이령길에도 보부상의 숨결이 살아있다.

구름이 숨을 고르며 힘을 내는 대간령 고갯길은 보부상의 고달프면서도 바지런한 삶과 상통한다. 경북 안동의 녀던길은 어린 퇴계의 배움터로 가는 행로다. 강원 속초 장사항과 고성 삼포항은 해안을 따라 여름바다의 진경들을 연결해놨다. 전북 정읍 정읍사 숲길에 담긴 애틋한 이야기는 전북 고창읍성의 황톳길로 이어진다. 전북 군산엔 일제의 그림자가 곳곳에 숨어 ‘역사는 말한다’고 속삭인다.



가을 언덕 색깔은 언제나 달랐다

한국의 차마고도 강원 정선의 새배재 가는 길엔 영령처럼 엷은 물기층이 기다리고 있다. 탄광 광부들이 떠난 자리는 원래 주인이었던 자연에게 다시 되돌아갔다. 새비재 고개를 넘어 산자락에 걸터앉은 이는 “자연은 위대하다”를 내뱉었다.

암벽에 새겨진 ‘갑인추정선’은 정선의 자취를 외치는 아우성이다. 내연산 폭포의 위용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내연산 삼용추’에 고스란히 들어가 앉았다. 강원 인제 점봉산 곰배령엔 주목과 철쭉이 주단처럼 천상의 화원을 만들어놨고 은비령은 우렁찬 계곡 소리를 친구삼아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전남 장성의 백양사 단풍은 첩첩이 둘러싼 내장산과 그림같이 어울린다. 경남 합천 가양산 소리길의 시내는 단풍과 합주에 들어간다.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장구한 세월을 내리친 물줄기가 깊은 협곡과 연못을 만들었을 것이다.”

충남 보령 신두리 해안에서는 모래사구를 만나게 된다. 짠물을 뒤집어쓰고서도 잘 자라는 순비기나무를 만난 건 행운이다. 해당화는 은은한 향기로 생의 자락을 흔든다.

겨울은 끝은 새로운 시작

겨울에 강원도 강릉 대관령을 넘어가는 길에선 널따란 눈꽃마을길을 만나게 된다. 대관령 서쪽에 있는 차항리는 가장 먼저 눈이 내리고 맨 나중에 녹는다는 곳이다. 평창의 태기산엔 얼음꽃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태백의 함백산에선 주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한다. 강원 원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겨울 바람을 갈라놓으며 한해의 아쉬움도 뒤안길로 제껴버린다.

강원 영월 동간 어라연은 여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과 대면하고 충남 태안 바다의 바람길도 겨울맛이 가득 담고 있다. 인천 옹진군 영흥도와 선재는 겨울바다의 추억을 되살린다.

꽁꽁 언 강원 영월 서강은 우뚝 솟은 선돌을 가득 안고 단종의 슬픔마저 숨죽여 포섭했다. 강원도 철원의 한탄강은 급전직하 깎아지른 얼음벼랑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 경기도 포천의 한탄강은 무채색의 담담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기다리고 있다. 인천 소래길의 협궤열차는 저물어가는 한해를 떠나보내는 예식을 준비케 한다.



강석우 “가만히 들여다보면”

배우 강석우는 추천사를 통해 “기왕에 걷는 길에 앞서 걸어간 그들(위대하든 평범하든)의 역사를 알고 함께 걷는다면 대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며 기꺼이 동행할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 언뜻 보기엔 그 흔한 인간에 지나지 않은 듯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 삶 존재의 역사가 있고 훗날, 크든 작든 자신의 역사를 남긴다”며 역사로 점철된 ‘길’과 인생의 연결고리를 짚어냈다. “살아있다는 것은 길 위에 서 있다는 말”이라며 역사의 길로 향하는 여정에 손을 내밀기도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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