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레미콘 아파트 입주했는데, 하자 책임은

2020-06-24 12:28:26 게재

양생기간 달라 부실 시공 우려 … 정부 “인증취소제 도입 아직 검토 중” 말만

아파트 건설현장에 불량 레미콘이 대거 유통된 사건 이후 하자 발생과 안전에 대한 우려가 지속되고 있다. 정부가 뒤늦게 대책을 마련한다고 나섰지만 이미 불량 레미콘을 사용한 아파트 단지 입주가 시작돼 사후약방문식 처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토교통부는 레미콘 배합비율을 조작하거나 2년간 불량자재 공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경우 납품승인 거부나 취소를 할 수 있도록 건설공사 품질관리업무지침 개정 절차를 밟고 있다고 23일 밝혔다. 하지만 이번 정부 대책은 사후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 경우 제재하기 어려운 땜질 처방이다. 불량 레미콘 생산은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부자 고발이 없으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해 성신양회 불량 레미콘 대량 공급 사건도 내부 제보자에 의해 수면 위에 올라 정부가 뒤늦게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불량 레미콘을 쓴 아파트는 사후 하자 발생 가능성이 높다. 시멘트를 줄이고 대신 혼화재를 넣으면 콘크리트 양생기간이 달라지는데, 건설사들은 기존 공정대로 공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사후 대책보다 하자 책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더 필요해 보인다.

레미콘 배합 재료 중 가장 비싼 시멘트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혼화재를 넣은 성신양회는 900억원 가량의 부당이익을 봤다. 레미콘 품질관리 기준에 따르면 공급하기로 한 배합과 실제 배합 원재료의 한계 오차는 시멘트의 경우 -1%에서 +2%까지다. 1만㎏의 시멘트를 배합한 레미콘을 납품하면 1%인 100㎏까지는 시멘트가 부족해도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성신양회는 시멘트 배합비율을 25%까지 줄여 대형 건설사에 납품했다.

시멘트 대신 혼화재를 넣으면 단기강도가 약해진다. 일정 강도를 내기 위해서는 레미콘 양생(완전히 굳어지는 단계) 시간이 더 필요하다. 건설현장에서는 시멘트 배합이 줄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당초 계산된 양생 기간에 따라 공정을 진행하게 된다. 레미콘이 다 굳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를 진행할 경우 향후 하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혼화재를 많이 넣은 레미콘의 장기강도는 안전성 기준을 충족할 정도로 단단해지기 때문에 사후 안전점검에서는 배합비율 확인이 잘 안된다.

국토부가 지난해 6월부터 한달간 품질 우려가 높은 15개 현장에 대해 골조 강도시험을 했지만, 안전 강도 기준을 벗어난 사례를 적발할 수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레미콘 업계 한 관계자는 "레미콘에 혼화재를 더 넣었다고 해서 안전에 치명적인 위협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필수 양생기간 차이가 나기 때문에 향후 내력벽에 금이 가는 등 하자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자가 발생하면 불량 레미콘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점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불량 레미콘을 사용했다는 점이 부각될 경우 아파트 가격 하락 등을 우려한 입주민들이 노출을 꺼리면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것으로 보인다.

국토부 산하 공동주택하자심사분쟁조정위원회에서 이번 불량 레미콘 사건으로 인한 하자책임 기준을 수립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입주 후 하자가 발생할 경우 입주민들이 원인을 규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불량 레미콘 사용 아파트의 경우 책임 소재를 미리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의 한 아파트 관리소장은 "골조와 설비 등 하자에 대한 담보책임이 기간별로 정해져 있어 시간이 지나면 보수하기 어렵다"며 "특히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가 하자로 나타났다는 점은 입주민이 입증하기 어려워 정부에서 불량 자재를 쓴 단지에 대해 하자 보수 기준을 명확히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건설시장에서 불량 레미콘 유통은 여러차례 문제가 된 후 대책과 자정노력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레미콘 업계와 건설사, 정부가 안전불감증에 빠진 동안 불량 레미콘은 주요 생활시설까지 잠식하고 있다.

성신양회 불량 레미콘은 수도권 아파트 뿐만 아니라 구리~포천간 고속도로, 공공건물 등 건설현장 270곳에 납품됐다. 정부가 아무리 감시망을 촘촘히 짠다고 해도 현장에서 레미콘 배합 프로그램인 '동하중 프로그램'을 조작하면 얼마든지 배합비율을 속여 납품할 수 있다.

처벌도 솜방망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김미리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13일 성신양회 공장장들과 영업본부장 등 5명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와 건설기술진흥법 위반 등으로 각 징역 1년6월~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성신양회는 벌금 2000만원만 부과받았다. 불량 레미콘을 공급받은 건설사들은 이들에 대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법원에 제출했다. 불량 레미콘으로 피해를 본 건설사들의 탄원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불량 레미콘을 둘러싼 탄탄한 역학 관계가 깨지지 않으면 '제2의 성신양회 사건'은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도 강화된 대책을 고민중이다. 배합비를 조작하거나 불량 레미콘을 공급한 경우 공장인증을 취소할 수 있게 산업표준화법 개정을 검토중이다.

국가기술표준원 관계자는 "고의로 기준에 맞지 않는 제품을 만드는 업체에 대한 인증취소 조항을 검토 중"이라며 "올해 안에 개정할 예정인데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신양회 사건발생 1년이 지난 상황에서 "아직 검토 중"인 것은 너무 느슨한 대응 아니냐는 지적이다.

김성배 김병국 오승완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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