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정치│5·18 민주화운동

왜 하필 '광주'였나

2020-07-17 12:30:57 게재
한홍구 / 창비 / 1만1000원
미래통합당이 강령에 '5·18 민주화운동'을 담는 것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한때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들어선 이후 달라진 미래통합당의 단면으로도 읽혔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이 '검토'를 호남표를 얻으려는 행태로 봤고 반대입장을 내놨다. 곧바로 강령에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당내뿐 아니라 핵심지지층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다. 여전히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선언이다.

창비가 내놓은 2권의 민주주의 역사공부시리즈 중 '4·19 혁명'이 아닌 '5.18 민주화운동'을 집어든 것은 다시한번 논란속의 역사에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4·19혁명은 1987년 민주화운동이후 헌법 전문에 들어갈 정도로 역사적 평가가 끝났다. 반면 5·18 민주화 운동은 청문회와 많은 연구를 통해 충분히 검증됐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한과의 연관성'을 연결고리로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명료하게 정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한홍구 교수의 강연을 정리한 이 책은 5·18 민주화 운동을 기초부터 다룬 교양서다. 시간을 쫓아가면서도 시공간을 달리한 주변이야기를 더해 입체적으로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 교수는 1978년 야당인 신민당이 집권당 민주공화당을 득표율에서 앞선 10대 국회의원 선거, 대학생들조차 숨죽였던 1979년 유신체제에서 생존권을 위해 나섰던 YH무역 여성들과 신민당 농성 그리고 정부의 강제진압이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로 이어졌다고 봤다. 김영삼 제명, 부마민주항쟁이 서열 2위가 서열 1위를 제거해야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한 교수는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김재규가 육군본부가 아닌 중앙정보부로 갔다면?" 김재규는 박정희 저격 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육군본부로 이동했고 체포됐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역 회군'에 대해서도 한 교수는 하나의 화두로 풀어낸다. "사실상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마지막 기회였으며 당시 회군하지 않고 더 농성했더라면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다.

그는 "부마민중항쟁은 학생들의 시위가 시민들에게 들불처럼 번졌지만" 당시엔 학생시위에 시민들이 동조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그러고는 "왜 하필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났을까"로 옮겨갔다.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과 시민들의 동참, 시위대의 무장화 과정이 자연스럽고 정연하게 이어졌다. 이때 한 교수는 "자 지금을 1980년 5월 26일 밤 9시 전남도청 앞이라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라면 거기에 남겠는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겠는가"라고 물었다.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가 된 데는 '죽은 자'를 바라본 전남도청사수대 300여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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