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요강꽃과 어리호박벌의 '비밀협약'
어리호박벌이 함진아비 역할 … 꽃가루 등에 지고 '수정' 시켜
'광릉요강꽃'(Cypripedium japonicum)은 멸종위기의 벼랑끝에 서 있는 식물이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1급, 국가적색목록평가 위급(CR), IUCN 범주 위기(EN)로 분류된다. 세계적으로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만 분포하는 난초과 희귀식물이다.
우리나라에는 경기 강원 전북 일부 지역에 매우 제한적으로 분포한다. 예전에는 명지산 화악산 천마산 화야산 죽엽산에도 많은 개체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1932년 광릉요강꽃을 처음 발견했던 경기도 광릉 죽엽산에서도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덕유산과 국망봉 등 극히 일부 자생지도 울타리를 치고 보호한다.
강원도 화천읍 동촌리 비수구미계곡에 멸종위기 1급 광릉요강꽃 1500여 개체가 자란다. 이곳은 광릉요강꽃과 멸종위기 2급 '복주머니란'(ypripedium macranthum) 1500여 개체가 사는 국내 최대 군락지다.
◆"평화의댐 공사 때 옮겨 심어" = 지난 1일 비수구미계곡을 찾았다. 광릉요강꽃 지킴이 장윤일(비수구미민박) 선생과 매년 봄 꽃이 피는 동안 이곳을 지키는 노영대 광릉요강꽃보존회장을 만났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이곳을 국내 최대 군락지로 만들었다.
사연이 있다. 2001년 수달 촬영을 위해 비수구미계곡을 찾은 노 회장에게 장 선생이 작은 사진 한장을 보여주었다. 광릉요강꽃이었다.
"이 식물을 어디서 구했습니까?"
"예, 1988년 평화의댐 공사가 시작될 즈음에 해산령에 길이 나고 내가 중장비 기름을 경운기로 날랐습니다. 그때 도로를 내는 불도저 밑에 깔린 예쁜 꽃 몇송이가 있어서 우리집 뒤에 옮겨심었습니다."
노 회장은 장 선생에게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알려고도 하지 마시고, 남들에게 보여주거나 주셔도 안됩니다. 그냥 잘 보호하고 계세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몇년이 지나 독수리 번식지 촬영을 위해 몽골에 있던 노 회장에게 국제전화가 왔다.
"비수구미 장 선생께서 급하다고 하시네요. 전화를 하세요."
"큰일 났어요. 멧돼지가 광릉요강꽃이 자라는 산언덕을 다 뒤집고 있어요."
귀국 후 급히 환경부를 찾아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예산이 없다고 했다. 당시 국립수목원에 근무했던 이병천 박사를 찾아 사정을 얘기했다. 국립수목원이 예산을 세워 군락지에 울타리를 둘러주었다.
그 뒤로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은 3000여포기까지 늘어났다.
장윤일 선생은 식물학자도 아니고 전문적인 지식도 없는 농부다. 하지만 국립수목원도 성공하지 못한 광릉요강꽃 대규모 증식을 이루어냈다.
그는 꽃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적당한 나무 그늘을 만들어주고, 여름에 뿌리가 타지 않도록 시원한 너덜지대 위 흙이 있는 장소를 골라 꽃을 심었다. 가뭄이 들면 물지게를 지고 하루에도 몇번씩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렸다.
◆"어리호박벌이 매개곤충 역할" = 광릉요강꽃은 왜 하필이면 꽃 모양이 요강인가? 왜 호박벌 같은 덩치 큰 벌을 매개곤충으로 삼는가?
2020년 5월 초 노 회장은 600mm 망원렌즈로 광릉요강꽃과 어리호박벌에 초점을 맞췄다.
꽃 안으로 들어간 어리호박벌은 그 안에서 왱왱거리며 한참을 있었다.
또 들어갔던 아래쪽 큰 구멍으로 나오지 않고 위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겨우 빠져나왔다.
어리호박벌 등에는 광릉요강꽃 수술에서 묻힌 샛노란 꽃가루가 가득했다.
"그렇구나! 광릉요강꽃은 통발과 같은 구조였구나! 어리호박벌은 왱왱거리며 고주파를 통해 진동화분매개(buzz pollination)로 함진아비 역할을 하는구나!"
노 회장은 "덩치가 작은 꿀벌은 할 수 없는, 어리호박벌의 매개곤충 역할"이라며 "20년 만에 광릉요강꽃 번식의 비밀을 풀 수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