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되는 청원 … 시민단체·이익단체 경연장으로 변질

2021-09-27 11:38:27 게재

의원이 청원 … 자신 법안 조속 통과 요구하는 청원 소개

높은 문턱·심사 후순위 … 국회 외면, 국민 등 돌리나

일반 국민들에게 폭넓게 열려야 하는 국회 청원이 조직력을 갖춘 시민단체나 이익단체의 전유물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이 낸 법안을 통과하도록 요구하는 청원을 소개하기도 하고 국회의원이 직접 청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일반 국민들의 입법 참여라는 취지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국회에 제출하는 청원 문턱이 높게 유지돼 있는 데다 어렵게 제출된 청원이 제대로 심사가 안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10만 명 동의로 상임위에 상정'되는 전자 청원인 국민동의청원 역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면서 조직력 과시용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의당, 플랫폼 반독점 운동본부 현판식│정의당 여영국 대표(왼쪽 세번째 부터), 배진교 원내대표 등이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플랫폼 반독점 운동본부 현판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국회사진기자단


2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들어 이달 23일까지 1년 4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들어온 청원은 모두 65건으로 이중 9건만 처리됐으며 56건이 계류 중이다.

청원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000년5월말부터 시작한 16대 국회에서는 같은 기간 315건의 청원이 들어왔지만 17대엔 207건, 18대엔 101건으로 줄었고 19대와 20대엔 각각 97건, 95건으로 위축됐다.


청원의 문턱이 너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의원을 찾아가 서명(소개)을 받아야 청원 접수가 가능하다. 인터넷으로 국민동의를 받는 국민동의청원은 30일 안에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내야 상임위에 접수된다.

이를 넘어서더라도 장기간 제대로 심사되지 않고 폐기돼 '청원 효용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청원인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도 생략되기 일쑤다.

상정도 안되고 논의 한번 이뤄지지 않은 청원이 수두룩하다. 이연국씨의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에 관한 청원은 국민동의청원으로 지난해 7월 7일에 10만 명의 지지를 받아 법사위에 제출됐지만 1년 2개월이상 지나도록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8일 문진석 의원 소개로 접수된 함석인씨의 '군 휴가 중 폭행사건 관련 보훈혜택 부여에 관한 청원'은 같은 해 9월 21일에 소위에 넘겨졌지만 단 한 차례의 논의도 없었다.

21대 국회 들어 청원소위는 회의록이 공개되는 15개 상임위에서 단 2번만 열렸다. 13개 상임위는 단 한 차례도 열지 않았고 교육위(2020년11월4일)와 환노위(2021년2월4일)가 한 차례씩 청원을 안건에 올렸다. 물론 국회법에 따라 청원소위가 아닌 법안소위로 넘겨 논의하기도 하지만 이는 청원소위를 별도로 둔 취지에 벗어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따라서 일부 단체들이 자신들의 요구나 의견을 표출하는 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참여연대는 15건을 제출했고 국민의힘 부동산시장 정상화 특위 법률지원단 홍세욱 변호사도 3건을 제출했다.

종교성 짙은 단체의 대표, 민주노총, 전교조에서도 단체의 힘을 활용해 의원소개를 받거나 10만 명 넘는 동의자를 얻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청원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국회청원 댓글부대를 모집하는 모 단체의 공지사항을 보게 됐다"면서 청원 취지를 설명하기도 했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에서는 유상범 의원을 통해 '김명수 대법원장 탄핵 소추에 관한 청원'과 '제헌절 공휴일 지정에 관한 청원'을 내놓았다.

박대출 의원은 김한나씨의 '박대출 의원이 대표발의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조속 통과 요청에 관한 청원'을 소개하기도 했다. 김주현 외 99명은 김윤덕 의원의 소개로 김 의원이 제출한 장애인보청기 사용환경 개선을 위한 관련법을 개정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곽상열씨는 서영교 의원의 소개로 재외국민들의 우편투표를 허용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 통과를 담은 청원을 제출했다. 서 의원을 비롯해 여야 다수의 의원들이 같은 내용의 법안을 제출해놓은 상태다.

송언석 의원 등 2만2953명은 윤두현 등 60명의 의원 소개로 송 의원의 지역구인 경북 김천시에서 코로나19를 치료하다 사망한 고 허영구 원장에 대해 의사자 지정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출했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는 이낙연 의원의 소개로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개정에 관한 청원'을 낼 수 있었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국민동의청원이 인터넷을 통해 쉽게 청원을 할 수 있게 됐지만 10만 명의 동의를 받는 것은 조직적인 움직임이 절실해 조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시민단체나 이익단체들이나 가능하며 일반인들이 30일 만에 10만 명의 동의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국민동의청원이 의미있는 참여제도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국회의 충실한 심의와 입법에 대한 반영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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