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말하는 산재예방 ⑥
흔들리는 중대재해처벌법
"결재 잉크도 안 말랐다." 직장인들은 몇번쯤 들어봤을 얘기다. 최종 결재권자의 결재 후, 다른 부서의 수정 요구에 대해 기안부서에서 거절하는 핑계로 하는 말이다.
시작 전에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부적절한 관례다. 지적된 오류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하다면 가급적 빨리 변경 절차를 밟는 것이 현명하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이 그럴 것으로 예상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입법 취지는 사고 예방에 관한 기업 경영 차원의 관심과 적절한 기여이고, 이는 대한민국 산업안전 수준의 정상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입법 후 제정된 시행령으로는 입법 취지를 살리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규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기준들의 정량, 정형성이 문제다.
법 제정에 관여한 분들의 고심과 노력을 모르는 바 아니나, 시행령 내용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잉크가 마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에서 시행령 개정 논의를 시작한 것은 훌륭한 대응이다.
고장난 시계
중대재해처벌법에서 경영자에게 부여된 의무의 핵심이 법 제4조 1항 1호에 명시된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이고 2항에서 이것을 시행령에 구체화하도록 했다.
그런데 시행령 제정에서 '그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성 및 규모 등을 고려하여'라는 1항 본문에 설정된 중요한 전제의 작동 문제를 놓쳤다. 그 전제를 염두에 둔 것은 안전보건 전담조직 편성 의무를 근로자수 500명을 기준으로 나눈 것 단 하나다.
1종의 바이러스부터 온 우주에 걸쳐 움직이는 모든 집합체에는 나름의 체계가 있다. 체계가 잘 갖춰지고 유연하게 작동해야 집합체의 건전성이 유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법에서의 '체계의 구축과 그 이행'은 법익 구현에 적절한 의무이고, '그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성 및 규모 등을 고려하여' 라는 전제 역시 매우 타당하다.
텔레마케팅과 같이 상대적으로 위험수준이 낮고 변화가 적은 경우와 대형 건축공사처럼 위험 수준이 높고 작업의 변화가 많은 경우에 대해 '업무절차에 따른 유해·위험요인의 확인 및 개선 점검' 의무를 똑같이 반기 1회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법에 정한 전제의 사업체 적용을 정량, 정형적인 기준으로 정확히 구체화하려면 2019년 고용부 사업체노동실태현황 중 5인 이상 사업체수 74만9682가지의 다른 설정이 필요하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정량적, 정형적으로 구체화된 현재의 시행령은 하루에 딱 두번 맞는 고장난 시계처럼 전체 법 적용대상 중 극히 일부 사업체에만 유효한 기준이 된다.
시행령 개정 방향
체계(Syetem)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세계 시스템공학회에서는 체계를 첫째 상호작용하는 부분으로 구성된 전체, 둘째 집합체 내의 하위 시스템, 소프트 및 하드웨어, 인간까지를 포함하는 전체, 셋째 집합체 구성원들에게 공유되는 심적 추상, 넷째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부분으로 분해할 수 있고 그 역이 가능하며, 다섯째 전체를 분해하면 전체의 특성은 사라짐 등으로 정의한다.
이들 정의는 속성·기능·범위들로 구성돼 있고, 정량, 정형적인 정의는 없다. 그 이유는 집합체마다 다른 특성 때문에 그렇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령도 같은 경우다.
기업별 최적의 체계 구축과 실행을 유인하려면 시행령 내용을 공통적으로 필요한 속성·기능·범위들로 구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행은 되지 않고 형식으로만 유지되는 상당수 기업의 안전보건 경영시스템처럼 사고예방과 무관한 서류업무만 가중시킬 것이다.
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은 지속적인 실행에 따른 자체적인 수정 및 진화다. 민간의 전문 컨설팅에서 목표는 약어로 S·M·A·R·T라는 속성을 갖출 것을 권고한다.
SMART는 Specific(구체적인) Measurable(측정 가능한) Achievable(달성 가능한) Relevant(관련된) Time-bounded(기한 기반의)의 약자다.
사회 일각에서 법령의 포괄성과 모호함에 따른 의율 상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법의 운영과 집행 차원에서 경영자 개인의 책임을 묻게 되는 의무의 구체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법익의 구현이 집행을 위한 조치보다 우선이다.
어린이가 없는 어린이집 시설 기준은 필요치 않다. 중대재해 감소라는 법익이 구현되도록 사업 특성과 규모에 적합한 안전보건 체계의 구축과 실행을 유인하는 것이 시행령 개정에서 최우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