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위기 퍼지나 … 위태로운 신흥국
이코노미스트 "1980~1990년대 비해 회복탄력성 개선됐지만 역으로 더 많은 빚 지는 상황"
최근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한 스리랑카 상황이 다른 신흥국들에게도 닥칠 신호인지 관심이 쏠린다. 저소득·중소득 국가들 전반의 부채율은 수십년래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식량과 에너지 비용이 치솟고 글로벌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상황에서 주요국 기준금리는 급격히 오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약 50여개의 신흥국들이 재정적 경제적으로 취약하다고 분석한다. 지속불가능한 부채를 지고 있거나 곧 그렇게 될 리스크가 높은 신흥국들이다. 일부 국가는 이미 디폴트를 선언했거나, 국채를 팔기 위해 매우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하는 형편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1980년대, 1990년대와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당시도 경제성장이 장기간 왕성했고 금융조건이 완화됐다. 그러다 침체를 맞아 부채부담이 치솟는 시기가 뒤따랐다"며 "거시경제적 충격, 인플레이션 급상승, 이에 따른 경제선진국들의 기준금리 인상 등으로 과도한 빚을 진 많은 가난한 국가들이 재정절벽으로 몰렸다"고 전했다.
대표적으로 멕시코정부는 1982년 8월 더이상 외채 이자를 갚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해가 가기 전 30여개국이 멕시코의 뒤를 따랐다. 1990년엔 전세계 공공부채의 약 6%가 디폴트 상황이었다.
이후 많은 상황이 변했다. 많은 국가들은 무역을 개방했고 경제를 자유화했으며 보다 엄격한 거시경제정책을 추구했다. 경제성장이 빨라지고 경제정책의 개선으로 신흥국 경제의 재정 체력이 개선됐다. 2008년 미국을 비롯한 경제선진국들이 심각한 금융위기에 빠졌지만, 중소득·저소득 국가들 전반의 공공부채 규모는 GDP의 33% 수준이었다.
신흥국과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연계성도 높아졌다. 하지만 글로벌 자본을 얻으려는 대부분의 신흥국들은 외화로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국통화 가치가 하락할 경우 전면적 위기로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2000년 전후 북미와 유럽, 일본 이외의 국가들이 발행한 신규 국채의 약 85%는 외화표시 채권이었다. 하지만 2019년 신흥국들이 발행한 국채의 약 80%는 자국통화 표시였다.
신흥국들의 금융시스템이 성숙하면서 자국의 자본시장을 활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게다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위기는 신흥국에 외환보유고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2005년 전세계 외환보유액은 GDP의 10% 미만 수준이었지만 2020년엔 15%로 상승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절정이던 2020년 디폴트를 선언한 국가는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 레바논 등 6개국에 그쳤다. 이들이 디폴트를 선언한 금액은 글로벌 공공부채의 약 0.5% 수준이었다.
신흥국 전반의 회복탄력성이 개선됐지만 이는 역으로 각국이 더 많은 빚을 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2019년 신흥국 전반의 공공부채는 GDP 대비 54%였다. 하지만 이듬해 코로나19 팬데믹이 부채의 폭발적 성장을 낳았다. 2020년 신흥국들은 GDP 대비 평균 9.3%의 재정적자를 냈다. 경제선진국 평균 10.5%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해에만 신흥국의 GDP 대비 부채비율이 10%p 상승했다.
2021년엔 상황이 다소 안정됐다. 글로벌 경제 전반에서 경제회복세가 시작되면서다. 하지만 올해 들어 상황이 반전됐다. 식량과 에너지가격이 급증하면서 전세계 대부분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위협받고 있다. 부채부담도 커졌다. 수입품 가격상승으로 스리랑카를 포함한 많은 취약국들의 자본이 마르고 있다. 외채에 대한 이자를 상환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경제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지속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신흥국들의 재정상황이 계속 악화될 것"이라며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공세적인 통화긴축으로 신흥국에 유입됐던 자본이 탈출러시를 벌이고 있다. 빚이 많은 국가들은 자본이 고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연방기금금리는 올해 말 3.5%에 다다를 전망이다. 게다가 사들였던 자산을 매각하는 양적긴축 조치도 이뤄진다. 1980년대 초 이래 가장 급격한 통화긴축 상황이 조성된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신흥국은 올해 3월 이후 매달 순자본 유출을 겪고 있다. 달러가치는 올해 초부터 현재까지 주요 통화바스켓 대비 12% 넘게 상승했다. 신흥국들 통화와 대비하면 더 크게 올랐다. 신흥국의 자본조달 조건이 악화하면서 일부 국가의 경우 차입비용이 치솟았다. 중소득·저소득 국가들이 발행한 신규국채의 약 1/4의 수익률이 미국채 수익률보다 10%p 이상 높은 상황이다.
글로벌 경제성장률이 둔화하고 금융긴축 상황이 겹치면서 신흥국들의 채무부담이 크게 버거워졌다. 상당수 신흥국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국통화 표시 국채 발행에 고전하고 있다. IMF는 'G20 채무상환유예 이니셔티브' 신청 자격이 되는 73개 저소득국가들 중 8개국이 지속불가능한 공공부채 부담을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30개국도 그같은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실정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물론 이들 국가의 부채위기가 글로벌 경제에 큰 위협을 주는 건 아니다. 이들 국가의 GDP를 모두 합쳐도 벨기에 정도에 불과하다"면서도 "하지만 이들 나라엔 모두 합쳐 5억명이 살고 있다. 이들 정부가 기초 인프라와 공공서비스에 투자할 여력이 되는지에 따라 5억명의 운명이 달렸다"고 전했다.
그리고 스리랑카와 비슷한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신흥국들이 있다. 이들 국가는 글로벌 금융시스템과 더 밀접히 통합돼 있다. 전반적으로 10여개국이 디폴트 직전 상태거나 매우 높은 수준의 국채 수익률을 제시해야 돈을 빌릴 수 있다. 이집트와 엘살바도르 파키스탄 튀니지 등이 이에 포함된다.
신흥국 일부는 과거보다는 글로벌 위기 파급력에 강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IMF 추산에 따르면 신흥국 공공부채의 약 16%가 외화표시 채권이다. 자국통화로 빌린 경우 글로벌 위기에 좀더 강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측면의 리스크가 있을 수 있다. 정부의 위기가 금융권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은행의 대출능력이 무너져 실물경제 위기로 발전할 수 있다. IMF에 따르면 신흥국 전반의 은행들이 보유중인 공공부채는 지난 20년 동안 지속 상승해 GDP의 17%에 달한다. 이는 선진국 은행 국채보유 비중의 2배를 넘는다. 은행 총자산 중 국채 비중은 브라질이 26%, 인도가 29%, 이집트와 파키스탄이 40% 이상이다.
신흥국 위기가 어디까지 퍼질지는 결국 브라질이나 튀르키예(터키) 등 거대 신흥국들에 달렸다고 이코노미스트지는 분석했다. 두 국가는 일부 취약점에도 현재까지 그럭저럭 상황을 헤쳐왔다. 하지만 정책적 실수는 이들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원자재 수출국의 대표격인 브라질은 올해 식량·에너지가격의 고공비행으로 큰 이득을 봤다. 게다가 브라질의 상당한 외환보유고는 현재까지 시장에 안도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오는 10월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계속 뒤처지면서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계속 국고를 허물고 있다. 브라질정부의 부채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대선에서 질 경우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고 떠벌린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현직 대통령이 이처럼 계속 시장을 협박한다면, 심각한 자본유출이 일어나 브라질이 재정난에 빠져 경제침체가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튀르키예 경제는 역동적이다. 공공부채 수준도 높지 않다. 하지만 외환보유고 대비 외채 수준이 높다. 게다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치솟는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에 저금리를 유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튀르키예 인플레이션은 80%에 육박한다. 리라화 가치는 지난 4년 동안 하락했다"며 "정책적 전환이 없다면 튀르키예정부는 국제수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50여개 중소득·저소득 국가들은 이미 부채문제를 겪고 있거나 그렇게 될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위기를 막기에 충분한 선택지가 거의 없다"며 "우크라이나전쟁 종전이 가장 큰 도움이 되겠지만 먼 훗날의 얘기가 될 수 있다. 중국 등 거대 신흥국들의 경제성장 반등은 양날의 검이 될 것이다. 신흥국 전반의 경제를 띄울 수 있지만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결국은 경제선진국의 추가적인 기준금리 인상을 야기할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