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현장 리포트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연말 인사말과 정치적 갈등
코로나 사태로 전세계인들이 한동안 공포에 휩싸였지만 2022년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가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휴일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이해하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점차 달라지고 있다.
최근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매년 약 16억장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구매했으며 이 중 53%는 전통적 종교 인사말인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가, 21%는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s)가 인쇄된 카드를 선택했다고 한다. 인사말로서 '메리 크리스마스'의 아성은 당분간 견고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공공종교연구소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미국 통계업체 '파이브서티에이트'의 2016년 분석은 연말 인사말의 뚜렷한 지역적 차이를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색채가 옅은 서부와 북동부 지역은 '메리 크리스마스'보다 '해피 홀리데이'를 선호했다.
연령에 따른 차이도 존재했다. 밀레니엄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크리스마스를 종교적 휴일이 아닌 문화적 휴일로 여길 가능성이 컸다. 2018 NPR 여론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엄 세대의 53%는 '해피 홀리데이'를 선호하는 반면, 38%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고 응답했다.
진보·젊은층일수록 '해피 홀리데이' 선호
그런데 우리가 큰 고민 없이 사용하는 연말 인사말이 미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갈등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2016년 선거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그의 선거운동 책임자였던 코리 레반도프스키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인들은 다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트럼프는 대선 참여 이전에도 스타벅스의 '홀리데이' 컵 출시가 크리스마스의 기독교적 가치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트럼프 진영은 대선에 참여하면서부터 온 상점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을 주요 선거운동 의제로 채택했다. 이는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미국 보수주의자들을 결집하기 위한 치밀한 선거전략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첫해 크리스마스부터 '메리 크리스마스'를 자주 언급했던 그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집회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글씨를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신의 업적인 양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사실 미국인들은 '메리 크리스마스' 혹은 '해피 홀리데이' 둘 중에 어떤 인사말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2005년 12월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41%는 '해피 홀리데이'로, 56%는 '메리 크리스마스'로 연말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점차 많은 미국인은 연말 인사말에 대한 선호가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지인과 고객들에게 어떻게 연말 인사를 건네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정치 사회적 의미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폭스뉴스, 연말 인사말을 정치 쟁점화
'크리스마스 전쟁'의 기원을 폭스뉴스(Fox News)의 보도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렇다고 폭스뉴스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 용어는 1999년 반이민 운동가 피터 브림로(Peter Brimelow)의 글에서 처음 사용됐다. 2005년 10월 존 깁슨(John Gibson)이 오라일리 팩터(O'Reilly Factor) 토크쇼에 출연해 자신의 신작 '크리스마스에 대한 전쟁: 신성한 기독교 기념일을 금지하려는 자유주의 음모가 생각보다 더 나쁜 이유'를 소개하면서 이 갈등이 재점화됐다.
깁슨이 주장하는 핵심은 정부와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반기독교 의제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깁슨의 예시들에 따르면, 2004년 아마존과 메이시스가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닌 '해피 홀리데이'로 연말 인사말을 바꾸었고, 일부 학교는 학사일정 공지문에 '크리스마스 방학'이 아닌 '겨울 방학'을 기재했으며, 미국 우정청이 발행한 연말 우표에는 크리스마스 상징이 아닌 눈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이 모든 예시가 미국 사회 내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없애고, 마약합법화 안락사 낙태자율화 동성결혼 등 세속적 진보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일상생활에서 슈퍼마켓 계산원이나 상점 점원이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로 인사하는 것조차도 기독교를 위협하는 행위로 본 것이다. 결국 '메리 크리스마스'를 고집하는 것은 세속적 진보주의를 반대하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2005년부터 폭스뉴스는 매년 이 주제를 언급해왔지만, 주요 언론 매체들은 이를 심각하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해피 홀리데이'라는 인사말이 세속적 진보주의 음모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점차 많은 미국인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퍼블릭 마인드에서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28%는 정치인들이 크리스마스에서 '그리스도'를 제거하려고 시도한다는 진술에 동의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교회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35%는 크리스마스 전쟁의 존재에 긍정하며 음모론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또한 공화당 지지자들이 이런 음모론을 믿는 비율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두배가 훨씬 넘었다. 그런데 작년 12월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10명 중 4명은 정치인들이 연말 휴일에서 종교적 가치를 없애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증가 추세를 보인 것이다.
폭스뉴스는 크리스마스 인사말을 일반적인 정치적 갈등으로 쟁점화함으로써 시청자, 심지어는 종교 문제에 무관심했던 미국인들조차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도록 부추겼다. 미국 사회의 세속화와 '해피 홀리데이'에 대한 우려가 정치적 논쟁과 연결되면서, '메리 크리스마스'에 대한 집착과 '다름'에 대한 경멸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한 케이블 언론매체의 보도가 미국 대중의 일상적인 행동까지도 상당 부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연말 인사말과 같은 사소한 말과 행동마저도 이제는 정치적 관점이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을 문제가 정치적 갈등의 한 줄기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강조에도 무신론자 급격한 증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또 다른 미국의 변화는 무신론자의 증가, 특히 가파르게 감소하는 기독교인의 추세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미국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 성인의 약 90%가 기독교인이었다. 한편 1970년대부터 천천히 증가하던 무신론자들의 비율은 1993년 9%에 도달했고 이제는 미국인의 약 30%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믿는 미국인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매우 강했던 미국은 이제 무신론자들이 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2021년 대통령직에서 퇴임할 당시, 트럼프는 크리스마스 전쟁에 맞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내가 선거운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다시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재임 기간에도 무신론자는 증가하고 기독교인들은 감소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선언이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당선이 보여주듯, 한때 인구 대다수를 차지했던 백인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기반으로 쌓아왔던 정치 사회적 문화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반발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연말 인사말과 관련된 정치적 갈등은 미국 내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 갈등의 불은 어디로든 쉽게 옮겨붙을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