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에 생산된 낡은 선풍기 수리하기

2023-02-27 11:07:18 게재

에머슨 한국지사도 "절레절레"

청계천에서 아르곤용접 '성공'

지난해 여름 강원도 정선 동강 제장마을에 사는 지인이 부탁을 했다. 오래된 미국산 선풍기가 하나 있는데 꼭 고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미국 에머슨 사에서 제작한 작은 선풍기였는데 목 부분이 부러진 상태였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1930년에 생산된 제품이었다. 당연히 100V 전용이다.

선풍기 머리와 몸체를 연결하는 부분이 부러진 에머슨 선풍기. 1930년대에 생산된 제품이다. 에머슨 한국지사에서도 수리가 어렵다고 했지만 청계천에서 아르곤용접으로 부러진 부품을 접합했다. 지금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사진 남준기 기자


"아니, 이런 선풍기를 왜 써요?"

"작아도 바람이 강하고 소리가 안 납니다."

오디오 동호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제품이란다. 소음 때문에 에어컨을 세게 틀 수가 없으니 약하게 틀고 이 선풍기를 돌리면 조용해서 좋다는 얘기였다.

"그럼 구매한 곳에서 고쳐야죠?"

"판매는 하는데, 수리는 못한답니다."

일단 배낭에 넣어서 올라왔다. 수소문해보면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에머슨 한국지사를 찾아서 문의했다.

"미국 본사에 보내면 방법이 있겠지만, 수리비보다 배송비가 더 들 것 같다"며 "한국에서 수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서비스를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페이스북에서 에머슨을 검색하니 미국에 에머슨 선풍기 동호인 모임이 있었다. 거기에 부러진 선풍기 사진을 올렸더니 "고치기 어렵다"는 답글만 달렸다. 인터넷에서 '중고 선풍기 수리 전문' 업체들을 찾아 사진을 보내고 문의를 했다. 다들 "고치기 어렵다"는 대답이었다.

중고 오디오점을 하면서 에머슨 선풍기를 판매하는 지인에게도 물어봤다. "저는 수리를 할 수 없고 청계천에 이런 미세 부품 용접을 해주는 분들이 있는데 가게들이 문을 많이 닫아서 연락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일단 현장에서 부닥쳐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약속이 있는 날 선풍기를 배낭에 넣어서 나갔다. 크기는 작지만 모든 부품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철로 돼 있어서 꽤 무게가 나가는 물건이다.

세운상가 입구에서 선풍기를 쌓아놓고 파는 상인에게 물었다. "옛날 미제 선풍기 고쳐주는 가게가 어디예요?" 그분 안내에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 가게를 찾았다. 그 가게는 주로 고장난 모터 코일을 다시 감아서 재생해주는 곳이었다.

"이건 우리 가게에서 고칠 수 없고, 아르곤용접으로 부러진 부분을 접합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배낭에 넣고 알려준 아르곤용접 가게를 찾아갔다. 세운상가에서 청계천을 건너가니 아르곤용접을 하는 가게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문을 닫았고 한집만 열려 있다. 이 사장님은 계속 통화중이다. 손님이 와도 전화통화를 하느라 본척만척이다.

통화가 끝나고 제품을 의뢰했는데 매우 조심스럽다. "용접은 가능한데 바로 안쪽에 모터 코일이 있어서 쉽지 않다"며 코일 코팅이 타지 않게 조금씩 천천히 식혀가며 용접을 해야 한단다.

선풍기 머리 부분과 몸체를 연결하는 긴 쇠막대를 빼서 분리한 뒤, 머리를 받치는 부품에 끼워서 아르곤으로 미세용접을 했다. 용접한 부분이 식은 뒤 다시 조립을 했다. 조립은 잘 모르니 직접 해보라고 했다.

선풍기 회전축 조립이 약간 어려웠지만 성공했다. 100V 전원에 꽂아 스위치를 넣으니 모든 게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용접 비용은 2만원 들었다.

선풍기 수리점으로 가서 회전축에 끼우는 와셔(나사받이) 2개를 교환했다. 쇠로 된 엽전 모양의 나사받이를 녹슬지 않는 소재로 교환했다. 나사받이 비용은 받지 않았다.

1930년대에 생산된 에머슨 선풍기는 지금도 동강 제장마을에서 정상 작동한다. 소비전력도 적고 모터에서 열도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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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남준기 기자 namu@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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