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고름'에서 '단추'를 거쳐 '지퍼'까지

2023-03-13 10:48:54 게재

'신기술' 지퍼 발명과 보급

5년 전에 산 패딩을 입으려는데 지퍼가 안 잠긴다. 자세히 보니 지퍼 머리(슬라이더)가 한쪽으로 삐딱하게 찌그러졌다. 작은 롱루즈로 눌러서 바로잡으려 했더니 그냥 뚝 부러진다.
YKK사의 '전통 메탈지퍼' 홍보화면(일부 트리밍). 사진 YKK 홈페이지
아까운 옷을 버릴 수 없어 패딩을 산 가게에 연락을 했다. "패딩 지퍼가 망가졌는데, 고칠 수 있을까요?"

"2년 이상 지난 제품이라 AS는 안되지만 수선해볼테니 보내주세요."

2주일 뒤 패딩이 집으로 왔다. 지퍼 머리만 교환을 했는데 원래 머리와 다르다. 세로기둥이 조금 더 두껍고 튼튼하다.

"원래 제품과 다르네요?"

"본사로 보내면 한달 걸립니다. 잘 아는 수선집에 부탁해서 고쳤으니 잘 입으세요. 이런 패딩 5년 이상 입으시면 옷장사들 다 망해요.(웃음)"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옷'은 약 7만2000년 전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의 머리카락에 사는 '이'(Pediculus humanus capitis)가 아니라 옷에 사는 '이'(Pediculus humanus humanus)가 이 무렵부터 발견되기 때문이다.

고 이어령 선생은 한국인 옷 매무새 변화의 역사를 '옷고름 → 단추 → 지퍼'라고 정의했다. 구한말 '조끼'와 함께 들어온 단추 문화가 개화기를 열었고, 한국전쟁 이후 지퍼 보급과 함께 현대 산업사회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지퍼는 19세기 미국에서 발명됐다. 지퍼는 당시 미국 제조업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발명품이다.

100년 전 산업혁명을 했던 영국이 보기에도 신기할 만큼 미국에서는 정교한 기계장치가 발달했다. 이런 미국식 제조 시스템이 발달한 것은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퍼를 발명한 휘트콤 저드슨은 마흔이 넘은 1880년대 후반에 발명을 시작했다. 1893년 그는 지퍼의 효시가 된 '클래스프 로커'(clasp locker)로 특허를 받았다. 긴 가죽장화를 여미는 용도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갈고리 때문에 옷에 사용하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지금과 비슷한 모양의 지퍼는 1906년 기드온 선드백이 발명했다. 갈고리 대신 양쪽 이빨을 교차시키는 형태였다. 그는 이 발명품을 '갈고리가 없다'는 뜻으로 '후크리스'(Hookless)라고 했다.

후크리스는 1차대전 때인 1917년 미 해군 비행복에 처음 적용됐다. 지퍼가 옷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퍼'(Zipper)란 이름은 1923년 굿리치사가 지퍼가 달린 장화의 상표명으로 붙인 것이다.

상용화까지 30년 걸렸지만 지퍼가 전세계로 퍼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은 1927년에 지퍼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의 전통 주머니 '킨차쿠'를 따서 '차쿠루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세대들이 지퍼를 '자꾸'라고 부른 이유다. 어릴 때 우리집 진돗개 이름도 '자꾸'였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지퍼회사는 YKK다. 지금도 전세계 지퍼의 절반 가까이를 생산한다. '명품' 지퍼로 이탈리아 람포(Lampo)와 스위스 리리(RiRi)가 유명하지만 생산량은 YKK에 못 미친다.

YKK 설립자 요시다는 지퍼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지퍼가 달린 옷은 아무리 좋아도 지퍼가 고장나면 쓰레기통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그는 지퍼 제조장비를 직접 만들고 지퍼의 주원료였던 황동까지 제련했다. 지금은 폴리 아세탈 수지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지만 그때는 가공성이 좋은 황동(일본말로 신주)으로 지퍼 이빨을 만들었다.

지퍼 이빨을 붙이는 옷감인 폴리에스터도 직접 합성해서 실을 짰다. 요시다는 이런 품질관리기법을 절대 공개하지 않았다. YKK는 이런 치밀한 품질관리를 통해 전세계 지퍼 시장을 장악했다.

한국의 지퍼 산업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품질에서 경쟁력을 갖지 못했다. 1985년 소비자단체 의뢰로 실시한 품질검사에서 41.4%의 제품이 '내구성 부족' 판정을 받았다.

수만번을 써야 할 지퍼가 뻑뻑하고 종종 이가 빠졌다. 새로 산 옷은 지퍼를 연필심(흑연)으로 '길들여서' 입었으니 흰색 패딩이라면 참 난감한 시절이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우리나라도 지퍼 품질에서 경쟁력을 확보했다. YBS나 HHH 같은 토종 지퍼 브랜드도 생겼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때 주요 지퍼업체들이 퇴출된 뒤에는 중국의 후발 지퍼업체들과 가격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남준기 기자 namu@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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