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말하는 산재예방 ⑮
안전 선진국으로 가는 길 (1)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중대재해법)이 제정된 2021년에 대한민국은 유엔(UN)공인 선진국의 지위를 얻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창립 57년 만에 전체 개발도상국들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승격시켰다. 일제의 수탈,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경제 선진국으로 이끈 선대의 피땀에 더해서 우리는 어떤 기여를 해야 할까.
지난 고속성장기에 경제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뒤쳐진 인권 민주 안전 등의 영역을 끌어올려 상호 신뢰가 넘쳐나는 진짜 선진국을 만들어야 한다.
안전이 낙후된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사회의 각 분야는 서로 밀접하게 연동돼 있고, 안전의 확보가 모든 분야 발전의 기본이기에 이 분야의 과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
후진국병 괘씸죄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35년 전에 비하면 민원을 상대하는 공공행정은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증명서 발급 등 대국민 민원 분야에서 공무원은 갑, 민원인이 을이었던 위치가 현재는 갑, 을이 바뀐 투명하고 친절한 공공서비스가 제공된다. 운전자의 상식이었던 면허증 뒤의 접은 지폐(뒷돈)도 사라졌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 라는 민주적, 합헌적 상황이다.
반면에 기성세대의 공공연한 괘씸죄는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규제 기관의 반감을 사면 응징이 있다는 생각에 갇혀있다. 암묵적으로 규범화돼 있는 이 괘씸죄가 기업의 안전과 전문기술 시장에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몇 해 전, 상당한 수준의 안전활동이 실행되는 대형 생산현장에서 정부 기관의 점검 뒤에 지적사항을 볼 수 있었다. 현장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지적들이 있었다. 점검을 나온 공무원이 젊은 사람이라고 하기에 현장 상황과 이견을 설명했는가를 물었더니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냐는 반문을 했다. 이런 상황이다. 괘씸죄가 규제기관 공직자의 눈과 귀를 막고 안전업무의 효율성 잠식에 더해 사고위험을 가중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실력보다 관계가 우선인 기술시장
개별 기업에서 안전 확보에 필요한 전문가들을 전부 고용하는 것은 효율성 면에서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전진단 자문 대행 등을 통해 기업에 안전 기술과 지식을 제공하는 다수의 기술용역 업체들이 활동하고 있고, 중대재해법 제정 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생산현장에 필요한 안전전문 기술과 정보의 주된 공급원으로 이들의 능력과 기여에 대한민국 산업안전 선진화가 달려있다. 얼마 전 정부에서 이런 업체들의 대형화를 언급한 것도 이런 측면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의 기술 용역업체 선택에 업체의 기술력보다 규제 기관과의 친밀도가 중시되는 것이 문제다. 부적절한 규제의 무리한 부담을 덜기 위한 해결사를 찾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장환경으로는 용역업체의 전문적 기술력 성장이 어렵다. 암묵의 괘씸죄가 전문 기술용역 시장을 망가뜨리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같이 해결해야
'정비 등의 작업시 운전정지'가 안전규칙 92조에 명시돼 있다. 그러나 운전정지 상태에서는 고장 부위나 현상을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음에도 법규에 이런 현실에 관한 고려는 없는 것 같다.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은 규제 기관 공무원의 재량권이다. 재량권은 양날의 칼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인다면 재량권이 크면 클수록 규제의 효율성은 증가한다.
최근 이 재량권이 긍정적으로 작동된 경우를 목격했다. 사망사고가 발생됐음에도 작업중지가 토사 붕괴라는 더 큰 사고 부담 요인임을 고려해 작업중지는 생략하고 합리적인 개선 내용의 조속한 이행을 요구한 행정명령이 있었다.
좋은 경험은 3번, 나쁜 경험은 7번 얘기한다고 한다. 거기에 긴밀한 사회망을 고려하면 1건의 부당한 규제는 수많은 정상 규제의 메시지를 변질시켜 괘씸죄를 고착시킨다. 기업 실무자들도 바뀌어야 한다. 대다수의 부적절한 규제는 현장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이해부족이 주원인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불합리한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무능과 배임에 해당한다.
괘씸죄 종식을 위해서 부당한 규제가 집행된 경우, 해당 규제를 신고한 기업은 괘씸죄 퇴치에 기여한 점을 고려해 장기간 해당 규제를 면제하는 등의 특단의 조치를 정부가 강구해주기 바란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