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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질환, 유전자 문제인가? 환경 탓인가?

2023-04-04 11:36:10 게재
최진희 서울시립대 교수 환경독성학

인간의 달 착륙에 필적할 만한 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휴먼게놈 프로젝트가 2000년대 초반 완성됐다. 인간은 마침내 스스로의 유전자 지도를 갖게 됐고, 이제 생로병사의 비밀을 풀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휴먼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된 지 벌써 20년도 더 지났다. 휴먼게놈 프로젝트로 밝혀진 유전자 지도를 바탕으로 생명과학과 의약학 분야에서는 그 간 엄청난 연구혁신이 있었고, 맞춤 의학 시대가 열렸다. 유전자와 질병과의 관련성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도 전장유전체(Genome Wide Association Study, GWAS) 기법 등을 이용해 활발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전자로 해석할 수 있는 인간질병은 겨우 5% 정도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인간질병 발생의 원인 규명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이후 질환 발생에서 환경요인의 기여도를 찾고자 하는 연구들이 진행됐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엑스포좀(Exposome) 연구다. 게놈(Genome)이 생물체의 유전정보의 총합이라면 엑스포좀은 인간이 노출되는 모든 환경 요인의 총합으로, 게놈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등장했다. 엑스포좀을 비롯한 다양한 환경독성·보건 연구를 통해 유해화학물질과 질환발생의 상관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축적되고 있다.

인간질환 100여개 중 80여개가 환경요인

사실 환경요인에 의한 질환발생이 규명된 최초의 사례는 산업혁명시대 영국에서 등장한다. 당시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에서는 후줄근한 멜빵 옷을 입고 검은 재를 온 몸에 묻힌 소년공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들은 주로 굴뚝청소를 했다고 한다.


영국의 가장 흔한 이름이었던 '톰'으로 불린 이 소년공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 음낭암 발생율이 높았다. 그 원인은 바로 굴뚝청소 과정에서 노출된 타르 성분 가루였다는 것이 퍼시벌 포트(Percivall Pott)라는 의사에 의해 규명됐다. 이는 화학물질이라는 환경요인에 의해 치명적인 질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최초의 사례였다. 결국 영국 의회는 18세 이하 청소년의 굴뚝 청소를 법으로 금지시킨다.

이후 환경요인과 질환의 인과성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밝혀져 왔다. 30년 동안 가족 단위를 추적한 스웨덴의 한 연구에서는 다양한 암의 발병이 유전적요인보다는 환경요인에 더 높게 기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가장 흔한 만성병인 당뇨병 같은 대사증후군도 우리 주변에 흔히 노출되는 화학물질과 연관성이 큰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비만 역시 화학물질과의 연관성이 의심되고 있다. 화학물질이 우리의 신체 내 지질대사 교란을 통해 비만을 유발시킨다고 추정되는데, 이러한 화학물질 그룹을 오비소젠(Obesogen)이라고 한다. 소아청소년의 성조숙증 역시 환경호르몬 노출과 연관이 깊다고 알려졌다.

지난해 인기 드라마로 관심을 받았던 신경발달질환인 자폐증은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와 미국 등에서 발병율이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동물실험을 이용한 독성연구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역학연구 모두에서 화학물질 노출과 자폐증 발병과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과학적 증거가 나타났다.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같은 퇴행성 신경질환도 농약 중금속 등의 노출과의 관련성이 입증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환경성질환이라는 화두가 10여년 전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아토피 비염 천식과 같은 알레르기성 질환인 '새집 증후군'이 그것이다.

그러나 환경성질환은 이들 질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분류한 환경성질환은 인간이 앓는 주요 100여가지 질환 중 무려 80여가지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환경유해요인과 질환발생과의 관련성을 규명하기 위해 6대 환경성질환군 6대 환경유해물질군을 지정해서 관리하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달 국가환경보건시료은행을 개소하고, 인체 내 유해 화학물질 노출 확인과 이로 인한 건강영향을 장기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유전자는 바꿀 수 없지만 환경 바꿀 수 있어

다양한 화학물질 덕분에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살아가는 오늘날이지만 그만큼 우리는 화학물질을 포함한 환경요인에 의해 생겨날 수 있는 질병의 위협에 더욱 자주 노출되고 있다. 영국의 톰에서 오늘날 우리 자신까지, 우리의 삶은 언제나 화학물질에 노출돼왔다.

질환발생의 원인은 유전자와 환경요인과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다. 우리의 유전자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환경은 우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