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그림·중년의 일상, 한권의 책이 되다

2023-05-19 10:53:51 게재

중구 주민·신인작가 독립출판 지원

"도심 인쇄·출판산업 재도약 시동"

"퇴직과 코로나19가 겹친 2021년 간암 진단을 받았어요. 시술받느라 병원에 갇혀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 그림을 가장 먼저 출판하고 싶었습니다."
중구가 지역 인쇄업계와 연계해 주민과 신인작가들 독립출판을 지원한다. 올해 사업에 참여한 30명이 출간에 성공했고 최근 출판기념회를 겸한 전시회를 열었다. 김길성 구청장이 작가들과 함께 책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중구 제공


서울 중구 만리동 주민 임종심(63)씨 소망이 이루어졌다. 병원에 있었던 17일을 포함해 그해 1월 1일부터 100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린 그림을 담은 '100일 100그림'이다. 2019년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만난 이들과 매년 작업을 해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3'부터 책으로 엮었다.

19일 중구에 따르면 임종심씨를 비롯해 주민 등 30명이 이달 '작가' 대열에 합류했다. 주민과 작가를 꿈꾸는 시민들이 첫 발을 내디딜 수 있게끔 독립출판을 지원하는 두개 사업이 결실을 맺었다. 중구 도심 대표산업인 인쇄·출판산업 재부흥을 위한 여러 시도 중 하나다.

독립출판은 출판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통상적인 절차와 달리 개인이나 작은 모둠이 기획부터 인쇄까지 주도해 출판하는 방식이다. 작가 본연의 개성을 담아 자유롭고 실험적으로 책을 제작하는데 최근 들어 사회적 흐름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중구는 올해 두가지 방식으로 독립출판 지원에 나섰다. 서울 전체의 67%에 달하는 5000여개 인쇄업체가 모여 있는 만큼 지역에 연고를 둔 업체를 연계, 작가들이 해당 산업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했다.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시작, 작가'가 그 중 한가지다. 15명을 선발해 독립출판에 대한 개요부터 표지와 내지 디자인, 출판과 유통의 이해 등 강의를 듣고 자신만의 책을 직접 제작하도록 했다.

완성된 원고를 가진 15명은 전문 인쇄업체와 멘토-멘티로 연결했다. 충무로 인쇄골목 이야기와 독립출판의 처음과 끝을 주제로 한 강의에 책 제작 멘토링을 더한 '우리는 책을 만듭니다(We Make Books)' 과정이다. 경쟁률이 19대 1에 이를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지난 8일부터 사흘간 예관동 중구청 1층 로비에서 선보인 30권이 그 결과물이다. 소설 희곡 시 수필 그림 만화 동화 등 분야도 다양하다. 올해 마흔아홉이 된 한 작가는 본인과 가족의 일상을 그림일기처럼 꾸며 '마흔, 아홉'을 펴냈고 또다른 작가는 17개 나라 49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려온 삽화와 수필을 묶어 '햇살의 표정, 밤의 기억'을 창조했다.

재건축으로 사라진 삶터에 대한 기억, 신도시 새댁이 구도심에서 느낀 문화충격도 책이 됐다.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길 때까지 모습을 담은 태교 그림,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 등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임종심 작가는 "그림을 한 장씩 그릴 때는 부족함을 느꼈는데 100개를 모으니 뿌듯하고 성취감이 크다"며 "디자인을 무료로 할 수 있는 공간, 공공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 등에 대해 입소문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구는 10월 도심산업축제에서 책들을 다시 선보이는 동시에 독립서점 입점을 지원할 방침이다. '주민과함께 책 만들기' '인쇄산업 인력양성' '인쇄인 직무역량 강화교육' '을지로 디자인 위크' 등 여러 사업과 상승효과도 기대된다.

김길성 중구청장은 "우수 작가를 발굴하고 중구의 독보적인 인쇄기술력을 활용한 출판으로 인쇄산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인쇄산업이 활성화되고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도약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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