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학살 희생자 보듬는 시민사회
일본정부 부정, 한국정부 무관심 속
전국 곳곳에서 추모·기억 문화행사
9월 1일은 '아시아판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간토대학살이 벌어진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 전인 1923년 이날 일본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민간인과 군경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방화를 저지른다' 등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희생자가 6661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도쿄 유학생으로 조직된 이재동포위문반이 밝힌 숫자다.
그날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이 전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일본정부의 부정, 우리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민간의 노력이다.
부산에서는 진상규명과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은 지난달 31일 부산 동구 항일거리 정발장군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정부는 간토 조선인 학살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이 단체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이 잇따르는 가운데 역사적 진실까지 묻혀서는 안 된다"며 이 같이 주장했다.
서울에서는 지난달 30일 간토대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국제행사가 열렸다. 독립기념관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은 이날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열고 '간토대지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100년, 진실·책임·기억'을 주제로 한 주제발표가 있었다. 이날 심포지엄에선 조선인 희생자 명부, 간토대지진 당시 중국인 노동자 학살 사건 실태 등을 공개하며 일본의 역사 왜곡과 역사 부정론에 대해 살폈다. 가토 게이키 히토츠바시대 교수는 일본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면서 "조선인 학살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라는 역사인식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이날 행사에 대해 "당시 무고한 조선인 6661명을 비롯해 중국인 700여명과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 등이 학살당한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 자리"라고 말했다.
그날의 아픔을 추모하기 위한 전시회·문화행사도 눈에 띈다.
시민사회진영에서 간토 학살 문제를 오랫동안 다뤄온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와 '기억과평화'는 지난달 25일부터 27일까지 충남 천안시 병천읍 아우내에서 추도 문화행사를 열었다. 지난달 25일에는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개관식을 가졌다. 이 역사관은 학살의 비극을 기억하고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설립됐다. 개관식과 함께 추도예배와 조형물 제막식, 1923평화인권문화제가 이어졌다. 26~27일엔 아우내만세운동순례길걷기, 관동대지진시 한인학살사건 학술좌담회, 100년의 북소리 퍼포먼스, 책으로 만나는 간토이야기 공동출판기념회 등이 진행됐다.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지난달부터 '간토대학살 100년-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간토대학살의 실상을 짚고 시민들의 추모 노력을 돌아보는 자리다.
서울 성북구에서는 사진전이 열린다. 보기 드물게 지자체가 마련한 전시회다. 서울 성북구는 성북구 종암동 문화공간이육사에서 추모 사진전 '봉분조차 헤일 수 없는 묻엄'을 개최한다. 천승환 작가 사진전이다. 천 작가는 2017년부터 희생자 위령비와 사적지를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알리고 올바른 역사 인식 속에서 한일 양국이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는 게 목표다. 이번 사진전에는 작가가 일본 현지에서 촬영한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20기를 주제별로 만날 수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성북에 거주했던 문인 이태준과 양주동 작품에도 영향을 끼쳤다. 1923년 당시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양주동은 방학을 맞아 귀국해 참화를 피했지만 작품을 통해 대학살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번 특별 전시의 제목 '봉분조차 헤일 수 없는 묻엄'은 그의 시 '무덤'에서 빌려왔다. 사진전에서 두 문인의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