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변곡점 맞는 K-반도체

2023-09-08 11:36:20 게재

반도체는 우리나라 제조업 중에서 가장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제조업 부가가치 총액은 641조3000억원인데 이중 18.5%인 118조7000억원을 반도체가 담당했다.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산업을 합한 부가가치액 61조8000억원(9.6%)의 약 2배 수준에 근접한다.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압도적이다. 2022년 기준 총 수출액 6836억달러에서 반도체는 1427억달러(20.9%)를 차지했다. 자동차 541억달러(7.9%) 및 자동차 부품 233억달러(3.4%)의 2배에 육박한다. 반도체 산업이 한국경제를 선두에서 끌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글로벌 위상도 견고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점유율 합계가 각각 75%와 52%에 달하는 D램과 낸드플래시에서 굳건한 1위다. 삼성전자는 전세계에서 TSMC 와 함께 7나노 미만 첨단 로직 칩을 제작할 수 있는 2대 회사 중 하나다. 이런 반도체의 역량과 위상이기에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칩4 동맹'을 구상하면서 한 자리를 배정했을 것이다.

반도체 산업 우리나라 제조업 부가가치의 18.5% 창출

대만 TSMC의 창업자 장중머우(모리스 창) 전 회장이 최근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미국과 일본 한국 대만 등 '칩4' 반도체 동맹과 네덜란드가 중국의 모든 급소를 잡고 있다"고 말했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 제조공정의 수율 전문가로 고든 무어, 밥 노이스, 제이 라스롭, 잭 킬비 등 반도체 역사의 전설적 인물들과 함께 일하며 세계 반도체 산업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그가 말한 급소에 해당하는 기업은 '기술적 해자'가 있는 독점적 기업들로 대부분 미국에 있다.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는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제조사로 실리콘 웨이퍼에 얇은 필름을 도포하는 기계 장비 등을 제작한다. 램리서치는 실리콘 웨이퍼에 회로를 식각하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KLA는 웨이퍼와 리소그래피 마스크 위의 나노미터 크기 오류를 찾아내는 세계 최고의 장비 생산업체다. 이들은 차세대 첨단 칩을 만드는 데 중요한 원자단위의 증착 식각 측정을 할 수 있는 장비제조 기술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다. 최신 마이크로프로세서는 개당 10억개의 트랜지스터를 탑재하고 있는데 칩을 설계할 때 이토록 많은 트랜지스터를 배치하는 작업이 가능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는 미국의 카덴스(Cadence) 시놉시스(Synopsys) 멘토(Mentor) 세 곳이며 이들이 세계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시장의 3/4 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장비와 기술이 다 갖추어진다 한들 네덜란드 기업 ASML의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가 없다면 최첨단의 애플 칩도, 엔비디아가 생산하는 인공지능(AI) 프로세서 칩도 만들 수 없다. ARM은 곧 미국 나스닥 기업공개를 앞둔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 자산기업(IP)인데 500여곳이 넘는 팹리스나 반도체 설계 제작회사가 이 회사의 IP를 사용하고, 특히 세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90%가 이 회사의 설계도를 이용할 만큼 독보적인 기업이다.

중·일 추격 뿌리치기 위한 초격차 혁신 이뤄져야

메모리 분야에서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AI반도체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면서 최첨단 AI반도체 생태계에 탑승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삼성전자도 늦었지만 HBM3 등을 통해 엔비디아에 공급할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K-반도체가 AI 최첨단 반도체 흐름에 어느 정도 대응하고 있지만 빠르게 추격해오고 있는 중국과 반도체산업 부활을 기치로 내건 일본보다 앞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최근 미국의 고강도 제재를 받는 화웨이가 신형 모바일폰 메이트 60에 7나노급 공정으로 제조한 '기린9000' AP를 탑재해 미국의 기술 통제 장벽을 뚫은 것은 아닌지 긴장감을 주고 있다. 물론 화웨이의 칩은 중국 파운드리 회사 SMIC가 전 세대 기술인 심자외선노광기(DUV)를 고도화시켜 더불 패터닝 기술로 제작했을 것으로 미국측은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ASML의 EUV 없이도 '자력갱생'으로 미국의 기술 통제 기준인 '10nm의 벽'을 뚫었다는 뜻으로 추격의 속도가 매우 빠른 셈이다.

K-반도체가 경쟁자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앞서나가기 위해서는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을 좌우하는 더 높은 기술력의 해자를 가진 부품 장비업체와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팹리스 스타트업이 생겨야 하고, 더 정교한 초고난도 기술을 통해 현재의 제조 공정을 혁신하는 기술 진화가 정부의 정책 지원과 기업의 노력으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안찬수 오피니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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