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인가 ⑩ 박 승 전 한은총재
“여야, 상생 아닌 제거하려는 적대관계 … 국민 선택 중요”
“국가발전 목표 놓고 실현 수단 경쟁해야 … 다당제·비례의석 확대 등 제도 개선 필요”
“20년내 경제성장률 0%대, 성장 정지 … 주택 문제, 빈부격차·결혼 출산 기피 주요인”
“연소득 대비 주택가격 10년 안에 절반으로 … 정부, 집값 떨어져도 부양정책 쓰면 안돼”
박 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할 정치권이 상생이 아닌 상대방을 극복과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적대관계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박 전 총재는 “여야 관계는 국가발전이라는 목표”를 갖고 “실현 방법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여야 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어 그는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수준을 높여야 한다”며 “투표를 통한 국민들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양극화가 확산돼 사회갈등이 심해지는 현상에 대해 박 전 총재는 “빈부양극화는 주택문제가 근본원인”이라며 “연소득 대비 주택가격을 10년 안에 절반으로 내리자”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물가를 포함한 소득은 연 4%씩 올리고 집값은 매년 3%씩 떨어뜨리면 충격없이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정부 정책은 꾸준히 일관성 있게 추진돼야 한다”며 “집값이 떨어지면 경기부양을 위해 부동산 부양정책을 써 왔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부동산 보유과세 강화정책을 원점으로 돌린” 현 정부를 비판하면서 “정부 정책이 장기적인 방향보다 인기영합적인 포퓰리즘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박 전 총재는 1936년생으로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한국은행에 입행한 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로 지내다 노태우정부에서 대통령실 경제수석을 거쳐 건설부장관을 역임했다. 김영삼정부 들어 대한주택공사 이사장으로 일했고 김대중정부에서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에 이어 2002년부터 4년여 간 한은총재로 통화정책을 주도했다. 인터뷰는 지난 달 4일에 이뤄졌다.
■우리나라의 경제 현주소를 진단해 달라.
우리 경제는 지난 60년간 수출 주도의 고도성장으로 지금 1인당 소득 3만 3000달러의 선진국 문턱까지 와 있다. 그런데 2020년대부터 성장 동력이 꺼지고 있어서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같은 장기 침체로 갈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30년 동안 평균 0.8%의 저성장을 이어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을 보면 생산 노동력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감소하고 있고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수출은 10년 전부터 성장세가 정지되어 있다. 내수는 가계부채가 많아 경제성장을 이끌어 갈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대로 간다면 우리 경제는 앞으로 20년 내에 경제성장률 0% 수준으로 성장이 정지될 것이다.
■상당히 어두운 전망이다. 성장 동력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경제 성장은 노동력과 노동 생산성이 결정하는데 이 중 노동 생산성은 과학기술과 투자 환경이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우리가 성장 동력을 회복하려면 첫째로 생산 노동력의 감소를 막아야 한다. 출산율로 안 되면 이민을 좀 더 개방하는 정책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과학기술 중심 성장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는 결국 과학기술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고 이런 점에서 첨단 기술은 세계적인 절대 우위를 갖도록 해야 한다. 셋째로는 투자 환경 개혁이다. 노동개혁, 규제 개혁, 교육 개혁, 조세 개혁 등을 통해 국내투자를 진작시켜야 한다.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다.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도 커지고 있다. 양극화의 원인은 어디 있다고 보는가.
우리나라 현재 양극화 현상은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빈부 양극화다. 빈부 양극화는 소득 격차보다도 자산 격차가 더 본질적인 문제다. 그리고 자산 격차는 부동산 투기로 인한 부동산 가격 상승이 주된 원인이다. 따라서 집값부터 다스려야 된다. 다음은 이념적 양극화다. 이것은 분단 상황과 남북 대치에 원인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북 관계가 개선돼야 한다. 세 번째가 세대의 양극화인데 고속 변화하는 한국사회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노년층과 젊은 층의 성장 환경이 너무 다른 데서 나오는 양극화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어느 나라나 발전과정에서 양극화현상이 있지만 한국의 양극화문제는 부동산 문제와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이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가 출산율 저하 문제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나라 물가가 지난 50년간 30배 올랐고 달러 표시 1인당 소득이 115배 증가했는데 집값은 3000배가 올라서 이것이 바로 빈부격차의 주범이 됐다. 현재 한국의 집값은 너무나 비싸다. 그래서 큰 개혁을 필요로 한다. 집값을 판단하는데 PIR(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 Price to Income Ratio)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중간 되는 주택가격을 중위계층의 연간 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2022년의 경우 서울의 PIR이 14.2인데 이것은 서울에서 중위 소득자가 14년간 월급 전액을 모아야 중간 정도의 주택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뉴욕은 7.1이고 런던은 8.7이다. 런던이나 뉴욕의 집값은 그 소득 수준에 대비해서 볼 때 서울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택 문제는 한국 빈부 격차의 근본 원인이다. 결혼과 출산 기피와 인구 감소의 주범이고 삶의 질을 악화하는 주범이다. 집이 비싸면 비쌀수록 그런 나라는 경제가 성장해 고소득이 되어도 저생활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이 지금 고소득 저생활국으로 가고 있다. 그러면 어뗳게 할 것인가. 연소득 대비 주택 가격을 10년 안에 절반으로 내리자. 10년 안에 PIR을 절반으로 떨어뜨려서 적어도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수준이 돼야 빈부 격차도 줄어들고 삶의 질도 높아지고 출산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10년 안에 PIR을 절반으로 떨어뜨리려면 물가를 포함한 소득은 연 4%씩 올리고 집값은 매년 3%씩 떨어뜨리면 된다. 집값이 재작년에 7%, 지난 해에는 5% 하락했다. 앞으로 매년 3%씩 떨어지는 것은 우리사회가 흡수할 수 있다고 본다. 앞으로 한국의 집값은 과거처럼 폭등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10년 20년 장기적으로 안정화할 것이다. 인구는 줄고 경제 성장은 침체해 주택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고 공급능력은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정책은 이러한 방향으로 꾸준히 일관성 있게 추진돼야 할 것이다. 집값이 오르지 않도록 주택공급은 계속 확대하고 집값이 떨어져도 폭락하지 않는 한 이것을 용인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집값이 떨어지면 경기부양을 위해 부동산 부양정책을 써왔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부동산 보유과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 오셨다.
지금까지 언급한 부동산 정책의 장기방향에서 나온 얘기다.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 자산소득격차를 줄이자는 취지에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소득과세는 무겁고 자산과세는 가벼운데 이를 시정하자는 취지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 부동산 보유 과세는 다른 선진국들의 3분의 1도 안 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와서 부동산에 대한 보유과세 강화정책을 모두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래서 개혁이 안 되는 것이다. 정부정책이 우리경제가 가야할 장기적인 방향보다 인기영합적인 포퓰리즘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출산 문제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절벽에 와 있다. 그동안 정부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사태는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되나.
우리나라는 지금 인구 문제가 국가소멸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우선 출산율을 보면 일본과 중국은 1.3, 미국은 1.7, 북한은 1.9, OECD 평균은 1.6인데 우리는 0.7로 세계 최저다. 그런데 고령화율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총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인 고령화율이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내년에 초고령사회에 들어가고 지금부터 20년 뒤에는 고령화율이 37%로 일본을 추월해 세계 제 1의 고령국이 된다.
이대로 가면 50년 뒤에 총 인구는 30% 감소한다. 그리고 생산가능인구와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인 노인부양비율은 현재의 5 대1에서 50년 뒤에는 1대 1이 된다. 이렇게 되면 젊은이 한 사람이 노인 한사람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는 역성장하게 되고 우리사회는 지방에서부터 소멸하게 된다. 학생 수는 거의 절반이 줄어들고 학교도 절반이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도서관 각종 운동시설 문화시설 편의시설 등도 모두 지방에서부터 없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300조원 이상의 재원을 투입해 왔다. 그러나 사태는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필요로 하고 있다. 첫째 출산 정책에 있어서는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주택 문제와 교육 문제이다. 젊은이들이 쉽게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소득대비 집값을 지금의 절반 이하로 내려야 한다.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가 모든 국민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의 사회화를 실현해야 한다. 독일이나 덴마크, 핀란드 등은 국가가 대학까지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고 대학생에겐 매월 약 100만 원의 지원금까지 부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선 저소득 가구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하여 저소득층에게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제공하고 자녀 교육문제가 출산 문제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소멸위험지역에 대한 공장건설 등 투자에 대해 각종 조세감면 투자세액공제 정부보조금 등 특단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민정책의 문호개방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정치가 득표에 도움이 되는 단기적인 현안만 챙기고 당리당략에 몰입하다 보니 국가 장래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민주국가에서 여야관계는 국가발전이라는 목표는 같고 다만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 방법을 놓고 경쟁하는 상생관계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야 관계가 상생이 아니라 상대방을 극복하고 제거해야 하는 적대관계처럼 인식 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는 투표를 통한 국민들의 선택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수준을 높여야 한다. 다당제의 채택, 비례의원 수 증가 등 제도적인 개혁은 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이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이야기해 주셨다. 어떤 해법이 있을까.
남북 간의 국력 격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작년의 경우 남한의 국내 총생산은 북한의 60배, 1인당 소득은 30배가 되어 남북 간의 경제력 격차는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 이렇게 못사는 북한은 세계 최후진국이지만 남한을 해치려 한다면 그 힘은 무궁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북한 정권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저돌적이고 불가측해서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서울에 재래식 폭탄 하나만 떨어뜨려도 우리가 입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북한은 지금 전쟁이 나도 잃을 것이 별로 없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크게 다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통일될 때까지 남북관계는 전쟁을 방지 하고 남북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위기관리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잘 살고 힘 있는 남쪽이 북쪽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것을 퍼주기라고 해서는 안 된다. 김대중정부에서 상업적 거래를 뺀 순 대북 지원액은 연평균 약 5억 달러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GDP의 0.06%이다. 1000만원 월급을 받는 형이 못 사는 동생에게 6000원을 주는 것인데 이것을 퍼주기라고 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이런 비용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보험료로 생각해야 하며 북한이 도전적으로 나올수록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와 포용 정책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 있는 쪽, 강한 쪽에서 할 수 있는 정책 카드라 할 수 있다.북한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 그동안 여러 차례 대화를 단절하고 대북 강경 정책으로 대응하였지만 이것이 북핵을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만 냈다는 사실을 거울삼아야 한다. 남북 관계에 평화만 유지될 수 있다면 최종적 승부는 결국 어느 쪽이 더 잘 살고 부강한 나라인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근래 한일관계가 정상화 되면서 한미일 공동방위체재가 강화되고 있는데 이것이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우리가 한국 안보를 위해서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한미일 3국의 집단안보 체제는 북 중 러를 결속시켜 두 진영 간의 냉전 체제를 복원시키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령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전쟁에 한국이 참전한다면 한국은 최전선에서 총알받이 역할을 할 수밖에 없고 일본과 미국은 좀 먼 거리에서 피해를 덜 입는 그런 상황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와 가장 큰 의존관계를 가진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야 우리경제도 좋다. 그래서 중국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의 안전과 경제를 감안한다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더라도 한국은 여기에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한국이 핵 개발은 하지 못하더라도 한국과 우방의 방위를 위해 오늘의 일본처럼 플루토늄 생산은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단기간에 핵을 개발할 수 있는 잠재력은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선 남북관계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국의 핵우산이 어느 정도로 유용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대북관계에서뿐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한국의 안전은 우리의 핵 개발능력에 따라 판연히 다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핵은 보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안보 위기상황에서는 단기간에 핵을 개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동맹국들의 안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