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날 새로운 진전
"자발적 탄소시장 활성화 위해선 무결성 확보부터"
인터뷰 | 유제철 자발적탄소시장연합회 회장
어차피 치러야 할 비용, 해외에 국내 기업이 돈 내지 않도록 해야
기후위기 대응 위해 정부 민간 등 모두가 함께 노력하는 구조 필요
22일 지구의 날이다. 온난화 억제 등 지구 환경보호를 위해선 정부는 물론 민간의 주도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선 당장의 이익이 더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탄소감축에 나설 수 있도록 환경 조성이 시급하다. 신뢰성 논란이 일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관련 기준도 만들어야 한다.
다행인 건 기업들도 기후위기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친환경경영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산업 등 다량의 물이 필수이지만 물 확보가 어려워질 거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기업들이 먼저 물 재이용 등에 투자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일들은 분명 반가운 변화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제대로 된 탈탄소사회 구현을 위해선 시민들의 날카로운 감시는 필수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정부는 물론 기업의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소송들이 벌어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아프리카 케냐는 유선전화 확대 단계를 뛰어넘어 빠르게 모바일 시대에 진입했죠. 국제 자발적 탄소시장에서 우리나라는 후발주자이지만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시작한 나라들의 전철을 따라서 단계별로 갈 필요가 없어요. 세계 최대 탄소배출권 인증기관인 베라(Verra)가 인증한 레드플러스(REDD+) 사업의 약 94%가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거의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는 등 신뢰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죠. 다르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늦은 게 아니라 불필요한 헛발질을 안 한 겁니다.”
16일 유제철 자발적탄소시장연합회 회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자발적 탄소시장은 △개인 △기업 △정부 △비영리 단체 등 다양한 조직이 자발적으로 탄소감축 사업에 참여해 탄소크레디트를 창출하고 거래할 수 있는 민간 탄소시장이다. 해외에서는 활발하게 자발적 탄소시장이 형성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초기 단계다. 레드플러스는 개발도상국에서 산림을 활용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사업이다.
한평생을 환경 분야에 몸담아 온 유 회장은 “환경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금융을 깊게 알아야 한다”며 “올해는 자발적 탄소시장의 무결성 문제에 대한 다양한 개선 방안이 실험대에 오르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3월 11일 출범한 자발적탄소시장연합회 초기 회장을 맡은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다. 자발적탄소시장연합회는 SDX재단의 지원을 받아 자발적 탄소시장에서 핵심적으로 역할을 하는 이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협치 기구다. 유 회장과의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내일신문 빌딩에서 이뤄졌다.
●친환경 위장 논란으로 자발적 탄소시장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자발적 탄소시장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도구라고 포기하기에는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 실현이 절박한 상황이다.
자발적 탄소시장이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선 탄소 감축 활동을 평가하는 인증시스템의 신뢰성 확보가 필수다. 감축 효과 측면에서의 정확성과 영구성, 검증 측면에서의 개방성과 투명성 등 무결성이 중요한 요소다.
국제적으로 탄소상품 신뢰성 확보를 위해 객관성을 기반으로 한 자발적 탄소 표준들이 개발 중이다. 또한 자발적 탄소시장 배출권의 투명한 거래를 위한 등록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추세다. 자발적 탄소시장 청렴위원회(IC-VCM)는 고품질 탄소배출권의 기준인 핵심탄소원칙(Core Carbon Principle)을 개발하고 있으며, 7~8월 1차로 핵심탄소원칙 기준을 만족하는 탄소배출권 유형을 발표할 계획이다.
제대로 투자를 해서 대기 중 온실가스를 줄인 배출권이 더 비싸게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 기업들도 무결성이 검증된 고품질의 배출권을 구매하고 싶어 한다. 이미 우량 탄소 상쇄 사업들을 국제적 기업들이 독식하고 있다. 이산화탄소 포집저장이나 공기 중 탄소 제거 같은 사업의 크레디트는 톤당 200만원 가까이 거래된다.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주요 구매자다.
한때 붐을 이루던 청정에너지 기반 탄소 저감 사업이 최근 들어 인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탄소크레디트 수입에 따른 보상이 청정에너지 기반 감축 사업을 추진하는 요인이 됐지만 요즘에는 탄소크레디트 발급 없이도 사업 추진이 활발하다.
크레디트 발급에 따른 부가적인 감축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향후 양질의 탄소 제거에 의한 크레디트 비중을 늘려 나가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 유럽의회는 기업이 탄소상쇄를 통해 탄소감축을 했다고 주장하는 일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상쇄배출권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으로 측정·보고·검증이 가능해야 한다. 감축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활동이나 계획에 대해 제3자 확인을 받은 뒤 배출량 감소를 정량적으로 증명하는 경우에만 배출권인 크레디트를 받을 수 있다.
발행된 배출권에는 고유 일련번호가 할당되고 등록부에 포함된다. 투명성은 물론 탄소배출권을 중첩해 계산하는 이중 청구(double-claiming)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발행된 탄소배출권의 최종 구매자가 구매한 배출권 양만큼 자신의 배출량에서 차감 청구하면 배출권을 재판매할 수 없도록 등록부에서 배출권의 일련번호가 영구 제거된다.
해외 공급망에 속해 있지만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ETS)에 참여할 수 없는 중소·중견기업들에게 자발적 탄소시장은 특히 중요하다. 자발적 탄소시장에서 크레디트를 매입해 원청 기업의 온실가스 감축 요구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자발적 탄소시장은 2030년까지 2020년(1억톤 수요) 대비 15배(15억톤 수요) 성장할 전망이다. 또한 2030년 시장 규모가 500억달러에 달하고 2050년까지 100배 규모로 늘어난다고 내다봤다. 이는 10년 안에 자발적 탄소시장이 규제적 탄소시장과 비슷한 규모가 될 거라는 의미다.
●최근 탄소배출권 유상할당 경매가 중단됐다. 규제적 탄소시장이 난항인데, 자발적 탄소시장 활성화가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 탄소배출권은 대부분 무상할당 돼 기업들의 탄소감축 투자를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무상할당은 오염자 부담 원칙에 맞지 않다. 또한 기업의 에너지 전환이나 친환경 기술 도입을 적극적으로 유인하지 못하고 가치사슬을 왜곡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배출권가격이 비싸지고 유상할당 비율이 확 늘어나야만 제대로 된 시장 기능을 할 수 있다.
국내 탄소배출권이 제대로 된 가치 평가를 받지 못하는 문제는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 인증서 가격은 큰 틀에서 유럽연합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EU-ETS)의 배출권 가격이다. EU로 수출 시 EU의 탄소배출권 가격과 수출국의 탄소배출권 가격 간 차액을 인증서로 구매해야 한다. 이는 곧 국내 사업자가 EU에 수출할 때 EU-ETS 배출권 가격과 대한민국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K-ETS)의 톤당 가격 차이를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에서 이 비용을 흡수해 유럽에 페널티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K-ETS 배출권 가격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할당 대상 업체들의 할당캡을 줄이고 유상할당 비중을 늘려 비용 부담을 미리 시켜놔야 한다. 어차피 치러야 할 비용이라면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서 지불하는 게 낫지 않나.
이렇게 되면 연쇄적으로 자발적 탄소시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규제적 탄소시장에서 탄소가격을 올리면 추가 수요가 생기고 그 수요는 상세배출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 자발적 탄소시장에서 제대로 탄소감축한 양을 공급하면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자발적 탄소시장과 규제적 탄소시장 문호가 열려야 한다.
●크레디트 품질을 높이기 위한 계획은.
자발적탄소시장연합회는 우리 기업들이 환경·사회·투명경영 공시 등 국제적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정부에게 명확한 시그널을 촉구할 생각이다. 이미 ‘적당히 하고 버티면 되겠지’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다.
다행히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가 탄소배출권 인증 사업을 시작했고 기대감이 크다. 국내에도 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인증 사업을 선도하는 기관이 하루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자발적탄소시장연합회는 대한상공회의소 등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적극 도울 생각이다.
이미 마이크로소프트 등은 탄소중립을 넘어섰다. 2020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2030년까지 ‘카본 네거티브(이미 배출된 이산화탄소까지 제거)’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탄소시장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국제기구와 국가들이 대규모 재원을 마련해 탄소중립을 달성하지 못하는 한 자발적 탄소시장은 중요한 탄소금융 조달 도구다. 기업들이 탄소중립에 뛰어들 수 있도록 독려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를 강화해야 한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
알기 쉬운 환경용어 설명
자발적 탄소시장 = 산림보존이나 저탄소 연료로 전환 등 상쇄사업(자발적 탄소감축 사업)을 하고 배출량 시나리오를 비교해 얼마만큼 감축이나 제거했는지를 정부나 유엔이 아닌 제3의 민간 기관이 인증하고 발행한 탄소상쇄 크레디트를 거래한다.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 규제적 탄소시장의 일종이다. 온실가스 배출자가 배출량에 비례해 가격을 지불하도록 하는 제도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권을 발행하고 기업들은 온실가스 배출량만큼 배출권을 시장에서 사서 정부에 제출한다. 기업(할당 업체)마다 감축 목표량이 있고 목표량만큼 감축하지 못하면 배출권을 구매해야 한다.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면 과징금을 문다.
탄소국경조정제도 = 온실가스 배출규제가 느슨한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을 유럽연합(EU)으로 수출할 경우 EU 제품과 동등하게 환경 관련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상품에 내재된 탄소배출량을 보고하고 배출량에 따른 인증서 구매를 의무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