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창간 22주년 기획 | 위기의 한국경제, 더 큰 도전을(하)
기업주도형 성장에서 사람주도형 성장으로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탈바꿈하려면 새 패러다임 불가피
창의적 인재 키워 혁신적 초소형 다국적기업 만들어야
정치적 이해로 기존 기업 보호하다가는 큰 코 다쳐
대한민국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절박하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탈바꿈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지금처럼은 안 된다는 아우성이 목까지 차올랐다. 기존의 경제공식을 빠짐없이 동원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지속된 탓이다.
정책·경제전문가들에게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물었다. 원인과 대안제시의 결이 달랐지만 문제의식은 비슷했다. 재벌의존·정부주도·양적성장 등 고도성장기 옛 패러다임으로는 더이상 힘들다는 것이었다. 해법으로는 경제민주화·양극화해소·스마트인재양성·제조업강화 등이 거론됐다. 특히 전문가들이 지목한 해법의 기저에는 기업주도 성장이 아닌 사람주도 성장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일신문은 이를 '인본경제'라는 말로 축약해 제시했다.(내일신문 11월 8일 1면 기사 참조)
◆선진국 문턱에서 발목 붙잡는 낡은 틀 = '과거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
한국경제를 고민하는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내놓는 말이다. 7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재벌주도, 정부주도, 양적성장 위주의 경제전략을 펴왔고 이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큰 성과로 돌아왔다. 이러한 전략이 추격자 그룹의 우등생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박재완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장(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고도성장기에 효율적인 전략으로 산업화시대를 잘 헤쳐나왔고, 중진국 함정도 극복해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과거에는 재벌대기업의 수익성이 높아지면 투자와 기술개발을 해 자연스럽게 일자리 창출과 성장률 제고로 이어졌지만 이런 공식이 통하지 않은 지는 오래 됐다. 자본과잉으로 금리가 1~2% 수준에 머무는 상황에서는 기업투자가 늘기 쉽지 않다. 정부가 재벌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도 과거와 비교 안 될 정도로 한정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정부 비위 맞추기 시늉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고환율정책·법인세인하 등 정부의 보호에 안주하던 재벌들은 경쟁력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 제조업의 위기로 표현되는 성장주도산업들의 심상치 않은 상황은 재벌들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대표적인 ICT기업인 삼성전자는 경쟁이 매우 치열한 산업구조 하에서 강자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고, 세계1위를 거머쥐었던 조선산업은 무작정 뛰어든 해양플랜트 산업에서 수조원대 부실을 내며 고전중이다. 추격모델에서 벗어나 선도그룹으로 뛰어올라야 하지만 준비가 덜 됐다.
◆아이디어가 밥 먹여 준다 =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격자)'였던 한국이 '퍼스트 무버(First Mover·시장 선도자)'로서 나아가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기업이 경제를 먹여 살려 왔다면 이제는 사람과 아이디어가 우리를 먹여 살릴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전문가의 학문·사상적 배경에 따라 노동·인적자본, 경우에 따라서는 동반성장·소득주도성장·경제민주화 등으로 표현이 달라지긴 했지만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주도 성장을 위해선 그동안 대기업이 잘 되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던 모든 경제시스템을 사람과 아이디어를 키우는 방향으로 리세팅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모든 경제시스템이 재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다면 재벌이 무너졌을 때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 이상을 차지했던 노키아가 몰락했을 때 국가적 위기에 처했던 핀란드가 예상보다 빠르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고의 인재들이 만들어낸 수없이 많은 벤처기업들이 경제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매출은 우리나라 GDP 대비 13.83%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예전 같은 고성장은 어렵지만 성장하지 않으면 기존 문제가 악화되거나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기 때문에 더욱 성장이 중요해졌다"면서 "그러나 안 되는 것으로 입증된 재벌의존성장, 정부 펌프질 성장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려 노동친화적 성장정책으로 가야 한다"면서 "동반성장, 경제민주화를 통해 밑에서 새싹이 자라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제민주화는 분배정책이 아니라 성장정책"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사람을 생각하는 분배정책과 기업을 생각하는 성장정책 이분법이 횡행했지만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리다 보면 노동분배가 늘어나게 되고 실질임금도 늘어날 수 있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한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분수경제'를 제시했다. 이 교수는 "우리경제가 재벌들이 투자 확대해주길 바라는 낙수효과에만 기대 왔는데 희망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며 "서민 중산층 노동자 자영업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면 구매력이 늘고 수요가 늘어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기업 보호본능 떨쳐야 혁신의 싹 돋아 = 구성장이론에서는 생산의 3대 요소를 토지 자본 노동으로 보지만 신성장이론에서는 사람 아이디어 재료를 생산의 3대 요소로 본다. 새로운 생산요소를 경제의 기반으로 보면 사람이 낸 새로운 아이디어가 축적된 지식이 확산되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꾀할 수 있다.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이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역시 사람, 즉 인적자본 투자에 기반을 둔 '스마트성장' 전략을 주장한다. 기계와 경주가 시작된 디지털 혁명 시대를 맞아 인적자본과 혁신에 중점을 둔 스마트 성장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한국이 그동안 추격전략을 통해서 다른 나라를 따라잡아 왔지만 이제 우리도 기술의 프론티어까지 왔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단계"라면서 "이 때문에 스마트한 인재를 키우는 문제가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스마트한 인재들이 수많은 마이크로인터내셔널한 기업, 즉 초소형 다국적기업을 만들어 전세계적인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대기업 생태계에 기생하는 중소기업이 아닌 자생력을 갖춘 혁신적 초소형 중소기업 생태계를 의미한다.
기존 기업에 대한 '보호본능'을 깨야 한다는 지적도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다. 낡은 산업 정책 고수, 또는 정치적인 이해 등으로 인해 기존 기업을 보호하려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혁신의 싹이 돋기 어렵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은 "경제민주화에 의한 창조적 중소기업 생태계를 형성해야 한다"면서 이윤공유제, 종업원지주제 및 경영참여 등의 제도적 대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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