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왜 사상최대 구제금융에도 무너지나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아르헨티나 고위 공직자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정부는 IMF 구제금융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다. 일단 받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신청 결정엔 단 5분이 걸렸다. 대통령은 합의에 만족했다. 결국 우리는 IMF로부터 500억달러를 빌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5개월이 지난 현재 사상최대 구제금융이 오히려 마크리 정부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2일 전했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유권자들은 집권여당에 등을 돌렸다. 지난달 11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예비선거에서 야당 중도좌파연합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후보가 큰 격차로 마크리 대통령을 앞섰다. 10월 본선거에서도 여당의 패배가 예상되고 있다. 다시 한 번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심이 흔들리고 있다.
예비선거 이후 금융시장 혼란이 이어지면서 아르헨티나가 9번째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황을 맞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급증하고 있다. 결국 마크리 정부는 지난주 1010억달러의 외채에 대해 IMF 등 채권단에 상환 연기를 요청했다. 지난주 단 이틀 동안 외환보유액이 약 30억달러 고갈됐다. 이러자 정부는 1일 개인과 기업의 외화거래를 통제하는 초강수까지 뒀다.
사상최대 구제금융도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IMF가 지난 1년여 동안 지지부진한 아르헨티나 개혁 프로그램에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지원했느냐는 의구심이 나오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우드로윌슨센터'의 아르헨티나 담당 연구원인 벤자민 제단은 "IMF 역시 투자자처럼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혔다. 남미 2대 경제국인 아르헨티나가 '워싱턴 컨센서스'를 잘 이행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1990년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가 남미 국가들에 제시한 경제위기 해법으로 △세제개혁 △무역·투자 자유화 △탈규제화 등 미국식 시장경제체제 이식을 골자로 한다.
이미 아르헨티나에 440억달러를 건넨 IMF는 어려운 결정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개혁 프로그램을 고수하면서 약속대로 이달말 나머지 54억달러를 지원하느냐, 아니면 손절매를 하고 차기 대통령이 들어서면 다시 협상을 하느냐다. IMF는 지난주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뒤 낸 성명에서 "아르헨티나 정부가 요청한 부채 상환 연장안의 파급력을 평가하고 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 아르헨티나를 계속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당초 아르헨티나에 대한 구제금융을 결정했던 IMF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이를 지속할지 여부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을 전망이다. 곧 IMF를 떠나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직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지난 7월 FT와의 인터뷰에서 라가르드 총재는 지난해 아르헨티나 구제금융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로서는 아르헨티나를 구제하겠다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구제금융액의 크기를 고려하면 IMF가 통 크게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경제위기
지난 70여년 동안 아르헨티나는 주기적인 경제위기에 시달렸다. 2015년 12월 마크리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그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히너 대통령은 정부 곳간을 탈탈 비웠다. 집권 마지막 며칠 동안 270억달러 지출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인플레이션은 25%에 육박했고 외환보유액은 극히 적었다. 수도 전기 등 공익사업과 대중교통에 과한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정부 재정을 고갈시켰다.
신임 마크리 대통령은 악재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거부였다. 정부 용역을 잇따라 따내면서 재산을 모았다. 냉정함과 실력, 현실감각 등 나라를 이끌 다양한 재능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마크리 대통령은 2016년 9월 FT와의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는 과거의 실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며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전망이 밝은 나라는 없다"고 단언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로서도 피하고 싶은 단 하나의 상황이 있었다. 그건 바로 IMF 구제금융이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경제위기에 IMF로부터 수차례 굴욕적인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으며 자존심이 꺾일 대로 꺾인 국민이었다.
아르헨티나는 60년 전부터 IMF와 관계를 맺었다. 가장 최악은 2001년 경제붕괴였다. 당시 역사상 최고액수의 부채 미지급 상황이 벌어졌다. 국민들이 은행으로 몰려 돈을 인출하는 뱅크런이 발생했고, 시민들의 불안은 폭동 수준으로 발전했다. 당시 대통령은 시위대를 피해 대통령궁 꼭대기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가야 했다.
그런 고통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해 우드로윌슨센터가 여론조사한 결과 아르헨티나 국민은 IMF를 가장 싫어했다. 우드로센터 제단 연구원은 "역사적으로 IMF가 아르헨티나에 들어올 때면 혹독한 재정긴축과 경제적 대혼란이 뒤따랐다"며 "아르헨티나 국민은 IMF를 슈퍼맨에 나오는 악당처럼 미워한다"고 말했다.
마크리 대통령이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점진적 방법을 선호한 건 당연했다. IMF가 부과하는 긴축과 그로 인한 정치적 위기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정부 소식통은 "마크리의 정치적 자문팀은 대통령에게 혹독한 긴축정책을 들고 임기를 시작해선 안된다고 조언했다"며 "그럴 경우 또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대통령궁을 탈출하는 비극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마크리 대통령은 의회 다수당이 아니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규모 공적지출 삭감을 자제했다. 점진적으로 경제성장률을 올린 뒤 국제금융업계로부터 투자를 받아 경제에 활력을 주려고 했다.
2년여 동안 마크리의 계획은 효과를 발휘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만성적 재정적자로 끊임없이 외국자본에 손을 벌려야 했다. 결국 시장의 인내심도 바닥나 지난해 페소화에 대한 투매현상이 본격화됐다. 마크리 정부는 결국 IMF 문을 두드려야 했다.
2001년 위기 때 아르헨티나에 대한 IMF 구제금융을 담당한 바 있는 클라우디오 로제는 "문제의 근본은 과도한 빚"이라며 "아르헨티나는 경제개혁을 서서히 진행하면서도 계속 거액을 빌릴 능력이 있다는 자만심에 빠졌다. 그게 실수였다"고 지적했다.
IMF 전임 수석이코노미스트이자 현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인 케네스 로고프는 "아르헨티나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며 "구조개혁 프로그램의 기본원칙은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일 때 정책도 비정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점진론을 고수하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분석했다.
마크리 대통령은 취임 초 몇가지 실수를 저질렀지만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신속하게 움직여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승인 받았다. 이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사적인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오랫동안 마크리와 친구였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친분을 과시했다. 트럼프는 1984년 마크리 대통령의 부친 프랑코로부터 9500만달러를 주고 뉴욕의 부동산을 사들인 일화도 소개했다.
캐나다 싱크탱크인 '국제지배구조혁신센터'의 헥터 토레스는 "마크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움직여 미 재무부에 로비했다. 그 결과 IMF가 아르헨티나에 사상최고액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고위 공직자는 "당시는 발빠르게 대처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었다. IMF는 관료적 조직이라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다"며 "우리는 미 재무부에게 호소했다"고 말했다.
IMF가 지난해 6월 발표한 지원액은 500억달러에 달했다. 아르헨티나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라가르드 총재는 당시 "지원액은 시장의 신뢰를 북돋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두달 뒤 시장은 페소화를 내던지기 시작했고 아르헨티나는 다시 IMF에 달려갔다. 6월 구제금융과 관련한 치명적 결함은 '페소화 환율을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둬야 한다'는 IMF 고집이었다. 금융시장에서는 페소화에 대한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두번 잽을 날리다 의외로 환율 방어가 허술한 점을 깨닫고 대거 투매에 나서게 됐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일했던 고위 경제학자는 "떼죽음을 예고하는 전조였다"며 "첫 번째 구제금융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기 때문에 경기침체를 일으키기 쉬웠다. 페소화 가치가 하락하면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경기활성화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아르헨티나와의 기나긴 협상을 통해 지난해 9월 추가로 70억달러를 지원키로 했다. 이 자금은 마크리 정부의 뜻에 따라 신속히 집행할 수 있게 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같은 계획 변경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IMF는 또 아르헨티나 정부가 페소화 환율을 방어할 수 있도록 시장개입을 허용했다. 하지만 '언제' '얼마나 많이'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제한을 걸었다. 이 제한이 너무 엄격한 탓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장 루이 카푸토는 결국 사임을 택했다.
마크리 행정부에서 일했던 한 고위 관계자는 IMF의 환율결정을 지적하며 "IMF 처방은 첫 번째 구제금융에도 두 번째 구제금융에도 모두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IMF야 자신의 원칙을 관철하려 했으니 변명이 있겠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먼저 IMF에 달려갔으니 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게 완전한 실수였다"고 말했다.
IMF는 아르헨티나에 대한 직접 언급을 삼갔지만, 아르헨티나에 부과된 개혁 프로그램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IMF는 아르헨티나의 구제금융 집행이 인플레이션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IMF에 정통한 측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 목표는 실패했다. 물가를 통제할 수 있는 정책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소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효과가 예상보다 더 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지출을 억제하기 위한 마크리 정부의 점진적 접근법이 가장 큰 문제라는 의미였다.
지난해 9월 IMF의 70억달러 구제금융으로 시장의 혼란을 잠재우긴 했지만, 아르헨티나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올해 들어 대선이 점차 다가오면서 금리가 70%를 훌쩍 뛰어넘었다. 기업들이 돈을 구하지 못해 좌절했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치솟았다. 인플레이션은 7월 중 54.3%로 정점을 찍기도 했다. 현재도 여전히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암울한 경제전망은 정권을 재탈환하려는 야당 중도좌파연합에겐 호재다. 야당은 시장친화적 성향의 마크리 대통령을 빗대 '대중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소수 특권층'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지난달 11일 예비대선 직전 여론조사를 보면 마크리 대통령 지지율은 야당의 페르난데스 후보와 막상막하였다. 하지만 개표함을 열어보니 15%p로 야당 후보가 이겼다. 선거 다음날 아르헨티나 증시는 37% 급락했고 페소화 가치는 사상 최저점을 찍었다. 외국 투자자들이 좌파정부의 재집권 가능성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시장의 불안이 확산되면서 마크리 정부는 IMF를 포함한 외국계 투자자들 부채 상환 연장을 요청했다. 국제신용평가사 S&P는 이를 '선택적 디폴트'라고 표현했다.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아르헨티나 디폴트는 십중팔구 벌어질 것"이라며 "채권투자자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투자금을 잃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해진 야당 페르난데스 후보는 IMF 구제금융에 대해 엇갈린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는 "IMF 구제금융을 갚아나갈 것"이라면서도 IMF의 행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지금의 위기를 만든 건 현 정부와 IMF"라며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재난적 상황을 책임지고 종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재무장관 다니엘 마르크스는 "페르난데스 후보는 향후 IMF와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으로 발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자와 기업들은 현직 대통령과 차기 유력 후보가 서로 협력해 시장을 안심시키고 불확실성을 최소화해 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한편 전문가들은 마크리 대통령이 취임 당시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면 상황이 퍽 달라졌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영국 런던 소재 채텀하우스의 연구원 빅터 불머 토머스는 "마크리가 일찍 IMF 문을 두드렸다면 효과가 컸을 것"이라며 "구제금융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게 너무 두려운 나머지 마크리 정부는 IMF에 손을 내미는 걸 주저주저했다. 그러다 문을 두드렸을 땐 이미 상황은 회복불가능하게 악화됐다. 그 결과 IMF 역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IMF 처방으로는 아르헨티나 상황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