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지하공간, 공공미술관이 되다

2020-07-07 11:01:06 게재

서대문구 유진상가 지하 50년만에 개방

빛·소리 어우러진 예술공간으로 탈바꿈

서울 서대문·종로·마포구에 걸쳐 흐르는 홍제천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 귀향한 여성들이 이곳에서 몸을 씻었다. 나라와 권력을 쥔 남자들 힘이 약해 여성들이 수모를 겪었지만 사람들은 이들을 '환향녀'라 불렀다.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 취급을 당한 이들이 가족들을 만나기 전 '더렵혀진' 몸을 닦던 곳이 홍제천이다.

환향녀의 아픈 사연에 남북대립의 상흔이 더해졌다. 1968년 1.21 사태가 벌어졌다. 남파 무장공작원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한 것. 깜짝 놀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방어태세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고 홍제천변 지금의 유진상가 지하에 대전차 방호기지가 만들어졌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이 유진상가 지하에 조성된 공공미술 프로젝트 '홍제유연' 작품 중 빛으로 꾸며진 기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이제형


홍제천 물길이 흐르고 있지만 50년간 버려졌던 이 지하공간이 공공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시와 서대문구는 이 공간을 상처를 기억하고 시민들 일상을 위로하는 힐링공간으로 꾸몄다. 흐르고 이어진다는 의미의 '유연'을 넣어 공간 이름을 '홍제유연'으로 지었다.

원형은 최대한 보존했다. 유진상가를 떠받치는 100여개 기둥과 지하 시설이 본 모습 그대로 유지됐다. 대신 기둥과 기둥 사이, 보행로와 물길 사이에 빛과 소리, 색을 입혀 환상적 분위기 예술공간으로 만들었다.

설치된 8개 작품에는 최신 미디어 아트 기법이 총동원됐다. 홍제천의 역사 이야기를 빛과 그림자로 표현한 설치미술작품 '흐르는 빛_빛의 서사'는 250m 지하 길을 장식한다.

잔잔히 흐르는 물의 모습과 빛·소리로 다시 생명을 얻은 홍제천을 상징하는 설치미술작품도 선보였다. 3D 홀로그램 작품인 '미장센_홍제연가'도 방문객들 눈길을 끈다. 공공미술 최초로 3D 홀로그램을 활용했다. 길이 3.1m, 높이 1.6m 스크린은 국내에 설치된 야외스크린 중 가장 큰 규모라는 게 구 관계자 설명이다. 중앙부를 포함, 크기가 각각 다른 9개 스크린이 연동돼 홍제천의 생태를 다룬 영상들이 입체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42개 기둥을 빛으로 연결한 라이트 아트 작품 '온기'는 홍제유연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돌다리를 밟고 빛 기둥 속에 서면 홍제천 물길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센서에 체온이 전해지면 조명색이 변하는 양방향 기술을 적용, 딱딱하고 일방적인 느낌을 주던 기존 공공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가 된다.

시민 참여로 만들어진 작품도 있다. 홍제천 인근 인왕초·홍제초 학생 20명이 완성한 야광벽화, 시민들이 직접 적어낸 메시지를 이름과 함께 새겨 만든 회전목판 등이다. '1000개의 빛'이란 부제가 붙은 회전목판은 지난해 11월부터 3개월간 모인 700여개 시민들 메시지로 꾸며졌다. 관람객이 목판을 손으로 돌려가며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홍제유연은 지난 1일 오후 2시 점등을 시작으로 시민에 개방됐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공개된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홍제유연이 코로나19로 닫힌 일상에 위로가 되고 서대문구 대표 관광·예술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공간운영과 장소 활성화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코로나 방역은 물론 24시간 보안카메라 및 순찰 인력을 적극 운영해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이 되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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