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세계의 석유시대는 종말을 맞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북아프리카·중동 전역에서 고통"
일부 아랍국가는 혹독한 조치에 나섰다. 지난 5월 알제리 정부는 재정지출을 절반으로 줄인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한 곳인 이라크의 신임 총리는 공무원 월급을 삭감할 방침이다. 오만의 경우 신용평가기관이 이 나라 국채를 '투기등급'으로 강등한 이후, 돈 빌리기가 힘들어졌다. 쿠웨이트의 재정적자는 현재 상태로 가면 국내총생산(GDP)의 40%에 육박할 전망이다. 현실화할 경우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몇달 전 국제유가가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감염을 막기 위해 이동을 멈추면서다. 상거래가 조금씩 재개되면서 약간 오르긴 했지만 석유 수요가 코로나 19 위기 이전으로 회복되려면 몇년은 족히 걸릴 전망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희망사항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전 세계 각국은 점차 화석연료를 멀리하고 있다. 석유 과잉공급에 청정에너지의 경쟁력 제고로 국제유가는 상당 기간 낮게 유지될 수 있다. 석유시장의 최근 급락세는 이상현상이 아니다. 미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 세계는 이제 저유가 시대에 진입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만큼 큰 고통을 받는 지역은 없다.
아랍 세계 지도자들은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진즉 알고 있었다. 4년 전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실상 군주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비전 2030' 계획을 선포했다. 2030년까지 원유수출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이웃하는 나라들도 비슷한 계획들을 추진했다. 하지만 빈 살만 왕세자의 한 측근은 최근 "2030년이 아니라 2020년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석유매출은 2012년 1조달러를 넘었지만 지난해엔 5750억달러로 반토막났다. 이 지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를 뽑아올리는 곳이다. 아랍국가들은 올해 석유매출이 약 3000억에 그칠 것으로 내다본다. 재정지출을 커버하기엔 턱없이 적다. 올 3월 이후 아랍국가들을 지출을 줄이고 과세를 늘리고 외부에서 돈을 빌렸다. 많은 나라들이 개혁조치를 위해 아껴놓은 현금을 탈탈 털어쓰고 있는 중이다.
재정적자 메우려 과감한 조치
고통은 이 지역 비산유국들에게도 퍼지고 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자국 시민들을 부유한 산유국에 수출했다. 이들이 본국 가족에 보내는 송금액은 일부 국가의 경우 GDP의 10%에 달할 정도다. 무역과 여행, 투자 등을 통해 산유국의 막대한 부가 비산유국에도 어느 정도 확산됐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중동은 전 세계에서 청년실업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꼽힌다. 석유는 비생산적인 경제에 돈을 댔고, 비도덕적인 정권을 유지시켰고, 원치않는 외세의 개입을 불렀다. 따라서 현 상황이 개혁을 촉발하고 보다 역동적인 경제, 대표성을 가진 정부를 만들 수 있다면 석유시대 종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물론 가장 부유한 산유국들은 단기간 저유가에 대처할 수 있다.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거대한 국부펀드를 보유하고 있다. 아랍세계 최대 경제국인 사우디는 4440억달러 외환보유액을 자랑한다. 2년 동안 재정을 댈 정도 규모다.
하지만 아랍권 전체가 저유가뿐 아니라 코로나19 팬데믹에 큰 피해를 보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방만한 재정을 운영해왔다. 지난 2월 코로나19가 걸프지역을 강타하기 전, IMF는 "바레인과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사우디 UAE로 구성된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이 2034년까지 2조달러 외환보유액을 써버릴 것"으로 예상했다. 2월 이후 사우디는 현금을 최소 450억달러 소진했다. 현 상황이 반년만 지속되면 사우디의 달러연동제는 거대한 압박을 받게 된다. 통화가치 하락으로 거의 모든 것을 수입하는 사우디 국민의 실질소득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사우디 정부는 걱정이 많다. 재무장관인 무함마드 알 자단은 "현대사 들어 듣도보도 못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재정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사우디는 노동자들에 대한 생계비 지원금을 보류했고 국내 유가를 올리고 판매세를 3배 늘렸다. 그런 조치에도 올해 재정적자는 GDP의 16%인 1100억달러를 넘을 전망이다. 기업과 개인소득, 토지에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증세는 이미 코로나19 격리·봉쇄로 침체한 상거래를 더욱 위축시킬 리스크가 있다.
사우디는 석유매출 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순례객이나 일반여행객을 늘리고 싶지만, 이 역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도시 메카는 지난 2월부터 외국인들을 들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연간 메카 순례객은 260만명에 달했지만, 올해 현재까지는 1000명 정도로 제한됐다. 골드만삭스는 "사우디는 생존을 위해 벗어나야 하는 석유의존의 덫에 더욱 깊이 빠진 모양새"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산유국의 격변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보는 이들도 있다. 걸프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원유를 뽑아올린다. 따라서 저유가 국면이 지속되면 시장 점유율을 늘릴 수 있다. 또 외국 노동자들이 떠나면 국내 노동자들이 공백을 메울 수 있다. 그리고 경제적 고통이 개혁조치의 정당성과 시급함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신용평가기관들은 사우디의 증세기조를 긍정 평가하고 있다. 지대추구 경제구조를 생산성 높은 구조로 바꾸는 조치라는 것. 새로운 자금줄을 개척하기 위해 아랍국가들은 국영자산의 민영화를 거론하고 있다. 사우디는 최근 라스 알카이르에 있는 세계 최대 담수화 시설의 매각을 선언했다. 하지만 현재 투자자들은 이 지역에 돈을 투자하기보다 빼는 데 더 열중하는 모양새다.
대중들의 분노는 커지고 있다. 사우디인들은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더 무겁게 다가오는 증세조치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한 실직자는 소셜미디어에 "빈 살만 왕세자는 왜 부자들에게선 돈을 걷지 않는가"라는 글을 올렸다. 사우디 북부 지방에 사는 네 아이의 엄마라는 한 여성은 "왕세자는 왜 값비싼 요트를 팔지 않느냐, 왜 우리와 다르게 사느냐"는 항의성 글을 올렸다. 이곳에서 빈 살만 왕세자는 또 다른 왕궁을 건설하고 있다.
이라크에선 월급 삭감에 분노한 공무원들이 경제난에 항의하며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무언의 지지를 보내고 있다. 1인당 연 소득이 2012년 5600달러에서 지난해 4000달러로 줄어든 알제리에선,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대중의 분노를 돈으로 막던 아랍권 지도자들의 관행은 이제 과거지사가 됐다.
비산유국은 더 큰 어려움
부패와 경제붕괴에 항의하는 시위대들이 이미 레바논을 다시 점령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수개월 동안 시위가 잠잠했던 곳이었다. 레바논은 산유국이 아니다. 올해 GDP가 13% 이상 위축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나라의 위기는 내전 이후 경제구조가 서비스와 금융 부문에 치중되면서 발생했다. 하지만 국제유가의 장기적 하락세가 레바논 등 비산유국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산유국에 파견된 노동자들의 송금은 비산유국에 단비 같았다. 이집트는 전체 인구의 3%에 육박하는 250만명을 부유한 산유국에 보냈다. 다른 나라들의 비중은 더 크다. 레바논과 요르단 국민 5%, 팔레스타인 인구 9%가 산유국에 나가 돈을 번다. 해외 노동자들이 보낸 돈이 본국 경제에선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하지만 석유매출이 줄어들면서, 이들의 송금액도 크게 감소했다. 산유국 내 외국인 일자리가 줄어들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의 보수도 크게 깎였다.
이런 상황은 실업률이 높아 인력수출에 의존하던 국가들 내에서 사회계약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레바논에선 매년 3만5000여명이 대학을 졸업한다. 하지만 레바논 경제가 제공할 수 있는 일자리는 5000개에 불과하다. 나머지 3만명은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인재의 엑소더스(대탈출)는 불가피하다.
이집트는 걸프지역 국가들에 비숙련 노동자를 제공해왔다. 1980년대 사우디에서 궂은 일을 하던 이집트 노동자의 1/5은 문맹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소지했고, 대학 졸업자 비중도 그때보다 2배 늘었다. 이집트는 현재 의료진이 부족해 코로나19에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다. 2016년 이후 의사면허를 가진 1만명 이상의 이집트인들이 해외로 이주했다. 그중 대다수의 정착지가 걸프지역이었다.
산유국 내에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지면, 비산유국의 많은 대학 졸업생들은 더 이상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산유국 내에선 보수가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다. 이집트 의사들은 한달 185달러 정도 번다. 사우디나 쿠웨이트와 비교해 많이 적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를 못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사회적 불안의 주요 요인이 된다. 거기에 더해 산유국에서 일하던 기존 노동자들이 계약이 만료되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옵션은 아니다. 두바이나 카타르와 같은 곳은 보수가 높을 뿐 아니라 일류의 사회적 서비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 1월 여론조사에서 부유한 산유국에서 일하는 이집트 노동자들의 10%만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했다.
비산유국 기업들도 마찬가지로 고통받고 있다. 산유국들은 다른 아랍국가들에게 거대 시장이다. 2018년 이집트 수출의 21%, 요르단 수출의 32%, 레바논 수출의 38%는 산유국을 대상으로 했다. 비산유국 기업들은 다른 교역국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집트는 아랍 국가들보다 이탈리아와 터키에 더 많은 물량을 수출한다.
하지만 기업들이 걸프 지역 이외의 국가들에 파는 제품들, 즉 정유제품과 금속, 화학 등은 이집트인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산업부문이다. 이 지역 국가들은 노동집약적인 상품을 많이 구매한다. 농작물이나 의류, 소비재 등이다. 이집트가 수출하는 TV의 절반 이상은 걸프협력회의 회원국으로 간다. 요르단 제약사들은 생산품 3/4 정도를 아랍 산유국에 수출한다. 요르단 제약업은 총수출의 10% 이상, 1만여명의 일자리를 담당한다.
돈 많은 여행객들도 줄어들고 있다. 레바논 여행업의 경우 쿠웨이트와 사우디, UAE 여행객들이 매출의 1/3 이상을 차지한다. 이집트에 오는 여행객 대부분은 유럽 사람들이지만, 걸프지역에서 온 여행객들은 레바논의 식당과 카페, 백화점에 더 오래 머무르고 더 많은 돈을 쓴다. 이런 나라들은 다른 나라 여행객으로 눈을 돌릴 수 있지만, 인근 부유한 산유국의 여행객을 대치하기는 어렵다. 사우디인들은 이집트 카이로나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여름을 보내곤 했다.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동질적인 데다 언어도 같다.
사우디 등 걸프지역 국가들이 중동의 권력과 영향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 역사적 우연이었다.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은 성지 순례객과 진주 교역을 제외하고는 알려지지 않은 벽지였다. 과거 걸프 지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건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대항해 전쟁을 벌이고 아랍 민족주의를 부르짖었다. 레바논은 금융과 문화의 중심이었다.
과거의 영광은 쇠퇴했다. 이젠 신흥 강자들의 영향력이 더 세다. 쿠웨이트와 사우디, UAE는 2013년 이후 이집트에 약 300억달러 자금을 지원했다. 레바논 수니파 정권은 오랜 기간 걸프국가들의 고객이었다. 내전 이후 레바논을 이끈 라피크 하리리 총리는 사우디와의 사업계약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의 아들 역시 지난해까지 총리로 재직했고 사우디 시민권을 갖고 있다. 걸프협력회의 회원국들은 지난 10년 동안 요르단에 2번이나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걸프국가들의 자금지원은 마르기 시작했다. 정치적 갈등이 부분적 이유다. 사우디에서 UAE 입장에서 보면, 자국이 지원했던 많은 아랍국가들이 이제는 그리 좋은 투자처는 아닌 상황이 됐다.
이집트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은 사우디의 예멘 침공에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 사임한 레바논의 하리리 총리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과격 무장단체 헤즈볼라에 지나치게 관대했다.
이집트는 지난 수년 동안 걸프국가들로부터 아무런 재정지원을 받지 못했다. 현재 심각한 경제난에 빠진 레바논을 돕는 국가도 없다. 요르단은 2018년 걸프국가들에 지원을 요청해 5년에 걸쳐 25억달러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2011년 지원액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 지역엔 더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은 이 지역에 '카터 독트린'을 적용했다. 미국의 군사력을 동원해 페르시아만에서 자유로운 원유 흐름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카터 독트린은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 이란 배후세력이 사우디 정유시설을 공격했을 때 미국은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주 뒤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사우디에서 철수했다. 걸프지역 밖에서도 미국의 개입은 줄어들고 있다. 리비아 내 혼란을 못본 체 하면서 이 나라에서 러시아와 터키 UAE가 각축을 벌이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차지하는 중동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미국도 점차 관심을 거두고 있다. 러시아가 공백을 메울지 모르지만, 이해관계는 협소하다. 시리아를 통해 지중해로 통하는 항구를 확보하려는 노력 등이다. 러시아는 아라비아반도 전체의 안정을 확대하려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 중국은 중동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신 경제적 이해관계에 집중한다. 알제리에서 건설공사 계약을, 이집트의 항구 사용권을 따내는 식이다.
하지만 아랍국가들이 더 가난해지면 중국과의 관계가 급변할 수 있다. 이미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석유매출이 급감한 이란은 항구에서 이동통신까지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중국 기업들에게 맡기고 있다. '전략적 파트너십'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일각에서는 중국이 부채가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기반시설을 지어주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원유수입이 줄어드는 아랍국가들에도 그와 같은 모델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면 미국과 중동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질 것이다.
출구가 없다
젊은 아랍 청년들에게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 물어보면, 대개는 UAE 두바이를 꼽는다. 2019년 조사에서 아랍 젊은이 44%는 UAE를 이상적인 거주 국가로 꼽았다. 무엇보다 두바이 경찰은 정직하며 도로가 잘 닦여 있고 전기가 끊기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레바논 경제가 붕괴하면서 모든 이들이 이민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걸프지역에서 남은 일자리가 거의 없다. 레바논의 한 여성은 "두바이는 언제나 탈출구였다"며 "이제 오도가도 할 수 없다. 대비책이 없다"고 말했다. 아랍 전역의 젊은이들도 비슷한 두려움을 느낀다. 이코노미스트는 "석유시대의 종말은 아랍권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변화는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