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천하대혼돈

인류가 마주한 혼란, 철학자 눈으로 보다

2021-01-08 11:42:39 게재
슬라보예 지젝/강우성 옮김/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1만5000원

모두가 인류의 위기를 말한다. 정작 우리는 위기의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변화, 4차산업혁명 같은 단어는 이제 위험성이 제거된 관용구가 돼버렸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도 인류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마주한 위기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고 다면적인 원인에서 비롯했기에 해결책은 고사하고 그 실상을 파악하기조차 쉽지 않다. 이 책은 인류가 마주한 전 지구적 혼란의 양상을 풀어낸 슬라보예 지젝의 칼럼집이다. 특히 책은 원저 없이 한국에서 처음 출간됐다. 대여섯 쪽으로 이뤄진 서로 다른 주제의 글들이지만 조각을 맞추어 퍼즐을 완성하듯 세계의 여러 양상을 연결해 위기의 전체상을 그려낸다.

각 글은 지젝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과 날 선 통찰을 품고 있다. 책이 다루는 주제는 현대정치와 문화 현상 가운데 이민, 반유대주의, 미국과 유럽의 정치 현안, 중국 문제, 기후 위기, 사회주의 등 지구촌 이슈를 총망라한다.

청소년기후행동, 국회의 기후위기 대응 촉구 퍼포먼스 | 청소년기후행동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11일 국회 앞에서 국회의 기후위기에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며 요구사항에 응하지 않을 경우 2030년 교과서에 올리겠다며 국회의원의 사진과 이름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국가체제 기반은 자본주의 해체"

저자는 우리 시대의 숱한 논쟁에 개입해 자기주장을 거침없이 내놓는 논쟁적 인물이다. 그가 펼치는 비판은 이념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때로 '상식'도 거스르며 분야를 넘나든다. 덕분에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고 자주 구설에도 오르내린다. 하지만 그는 한때의 위로나 미봉책을 제시하는 철학자가 아니다. 책에서 저자는 과연 위기의 정체가 무엇이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지젝의 정치학은 국가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해체이다. 지난 세대까지 세계를 지탱해온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지향점은 현재에 이르러 힘을 잃었다. 권위주의를 전복하고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목표를 이룬 여러 저항이 마주한 것은 되풀이되는 실업, 가난, 사회 부패 등 자본의 실재였다. 위기의 근원은 우리 체제 자체에 내재하기에 현재 나타나는 좌파의 저항 정치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현존하는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으로는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의회 민주주의로는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단순히 한 정치 정당이 더 많은 투표를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게다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그 정치경제학은 구조적으로 급진적 정치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기후 위기론을 경제 논리로 바꾸는 식의 환상을 재생산하며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즘의 망령을 불러낸다.

총 5부로 나뉜 책은 1부에서 평화적 공존이라는 미명 아래 '자본'이라는 실재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허용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허위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이어 2부에서는 각종 허위 대립을 일으켜 현대정치를 혼란하게 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유령을, 3부에서는 정치구조는 물론 무의식 세계까지 파고들기 시작한 '디지털 정치학'을, 4부에서는 문화와 권력이라는 불가분의 관계와 인간 심리의 심층을 다룬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5부 '대혼돈을 넘어'에서 지젝은 정치의 대혼돈이 어떤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불러올 수 있는지 탐색한다.

특히 5장에서 만날 수 있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지젝의 시각도 흥미롭다. 저자는 전지구적 온난화 덕분에 인류 스스로 기초적인 수준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생물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때닫게 됐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지구온난화의 교훈은 인류의 자유가 기온, 대기의 구성, 충분한 물, 에너지의 공급 등 지구 생명체의 안정적인 자연적 매개변수를 배경으로 해서만 가능했다는 점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분명해진 우리 자유의 한계가 인간의 자유와 지배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초래된 역설적 결과다. 다시 말하면 자연을 변형시키는 인간의 능력이 지구 생태의 근간이 되는 바로 그 지질학적 매개변수의 균형을 파괴한다.

파국 앞에서 국가간 대결벌여

인간은 온난화의 위험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역설적으로 파국의 충격만이 인간을 각성시킬지 모른다. 이 와중에 국가간 대결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는 우리 삶이 평소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우리 내면조차 바꿔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지젝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다시 돌아보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리고 다시 좌파 진영부터 또 다른 반기득권 전선을 체계적으로 조직해 혼돈을 헤쳐나가기를 촉구한다. 천하대란, 형세대호(천하가 대혼란이지만, 기운은 상서롭다) 이 천하를 휘감은 대혼돈은 새로운 질서 출현의 조짐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인 지젝은 현대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힌다. 그는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파리제8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학 프린스턴대학 파리제8대학 런던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 경희대 석학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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