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에너지 자립마을 꿈꾸는 대전 대덕구 미호동 '넷제로공판장'
"에너지 자립의 본보기 된다면 더 바랄게 없죠"
친환경생활용품·지역농산물 판매장 개장
지자체·주민·환경단체·환경기업 협업
"탄소 제로, 에너지분권 이뤄야 가능한 일"
옛주소 대전 대덕구 미호동 262-4. 새주소로는 대청로 515. 대청댐을 사이에 두고 대통령별장 청남대와 마주하고 있는 이곳에 아담한 2층 건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엔 대통령별장을 지키는 대청파출소로 쓰던 건물인데 지금은 '미호동 넷제로공판장' 간판을 달고 있다. 지난 5월 13일 문을 열었다. '넷제로'는 배출하는 탄소량과 제거하는 탄소량을 더한 순 배출량이 '0'이 되는 것, 즉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모두에게 열린 '에너지자립 공부방' = "어서 오세요. 이곳은 지구를 살리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삶으로 알려주는 공간, 마을 주민들과 함께 우리 마을부터 선택과 행동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곳, 미호동 넷제로공판장입니다."
방문객을 맞는 이는 이곳의 운영을 맡고 있는 사회적협동조합 '에너지전환해유' 이사장 양흥모(48)씨다. 대전충남녹색연합에서 환경운동 활동가로 일하던 그가 이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바로 '에너지 분권'이다.
'해유'는 오랫동안 기후위기 대응 활동과 에너지전환 운동을 해온 대전충남녹색연합과 신재생에너지융합사업 등 재생에너지 보급에 앞장서 온 ㈜신성이엔에스가 만든 사회적기업이다. 그들이 대덕구와 손잡고 미호동에 터를 잡은 이유는 이 마을을 '에너지 자립마을'의 본보기로 만들어보고 싶어서다.
◆넷제로공판장은 '탄소중립' 실천장 = 건물 앞에는 우리에겐 이름이 생소한 무환자나무 두 그루가 자리잡고 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자생하는데 열매는 천연세제의 원료로 쓰인다. 실제 이곳에서는 이 열매를 이용해 천연세제를 만들어 방문객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별도 포장은 해주지 않는다. 용기를 가져오면 1g에 16원씩 판다.
마당 한 편에는 미니 태양광발전기가 두 대 있다. 325W 용량의 이 발전기는 이곳을 지나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휴대폰을 충전해주고, 공판장 선풍기를 돌리는 전기로 사용한다.
옥상에는 3㎾ 규모의 태양광발전소가 설치돼 있다. 조만간 9㎾를 추가할 계획이다. 이 규모면 외부 도움 없이도 건물 전체 전기를 충당할 수 있다. 옥상에는 빗물저장소도 있는데, 이 물은 화장실 등 생활용수로 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이 공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우선 2층은 넷제로도서관이다. 기후위기와 에너지전환, 환경 관련 도서를 전시하고 판매한다. 에너지전환 관련 다양한 모임이나 교육을 할 수도 있다.
건물 1층은 넷제로공판장이다. 이 공간을 만든 진짜 이유가 이곳에 있다. 지구에 해를 끼치지 않는 생활용품과 에너지전환 상품을 판다. 비닐과 플라스틱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제품은 종이나 자투리 천으로 포장했다. 가져온 용기에 넣어 파는 천연세제를 제외하면 다 고체상품이다. 플라스틱 용기를 쓰지 않으려는 의도다. 대나무로 만든 칫솔과 치솔통, 고체 치약, 옥수수전분 치실, 유기농 면으로 만든 양말 같은 친환경 생활용품을 판매한다. 종이연필 대나무연필깎기 같은 재생 문구류도 있다. 가격이 싸지는 않다. 그래서 방문객들이 선뜻 집어 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무엇부터 실천해야 하는지를 써 본 사람들은 알기 때문이다. '다행공방' 사람들이 만든 물건도 판다.
◆95세 김완득 할머니 된장이 대표상품 = 매장 가운데에는 지역 농산물 판매대가 있다. 마을 주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아주 조금씩 나눠 포장해 팔고 있다. 대부분 자급농들이 생산한 것들이다. 대농들이 생산해 파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먹고 남는 걸 내다 파는 게 대부분이다. 말린 고시리도 있고, 오디효소도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은 말린 천연수세미다. 가져다놓기만 하면 금세 팔린다. 내년에는 수세미를 재배하겠다는 주민들이 여럿이다. 하지만 이 판매대 대표 상품은 '김완득 된장'과 '김완득 간장소금'이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굳이 친환경이니 국산이니 하지 않아도 된다. 이 마을에 사시는 95세 할머니가 드시려고 만든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 포장한 거다. 미호지기(판매담당) 송순옥(51)씨는 "이 판매대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공판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주민들이 넷제로공판장에 애정을 갖고 함께 탄소중립마을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매장 한쪽에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도 판다. 라면과 진간장, 소면 등 일반 수퍼마켓에서 파는 것들이다. 이 공간이 한때는 주민들에게 생필품을 파는 마을 공판장이었다. 그래서 장에 가기 어려운 마을 할머니들이 이곳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넷제로공판장이라는 이상한(?) 물건을 파는 곳으로 바뀌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찾는 물건 몇 가지를 가져다 놓았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배려고 애정이다. 주민들도 기분이 좋다. 넷제로공판장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차선도 미호동복지위원회 위원장은 "이곳이 지구에도, 주민의 삶에도 모두 이로운 공간으로 자리잡길 바란다"며 "미호동을 찾는 분들이 풍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까지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을에서부터 탄소제로 실천 = 정부가 5일 2050년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한 에너지·산업·수송 등 각 분야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제시했다. 대통령직속 2050 탄소중립위원회가 내놓은 시나리오 초안이다. 그런데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다. 산업계는 산업계대로, 환경단체들은 환경단체대로 불만이다. 어떤 이는 과도한 목표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너무 미온적이라 비판한다. 결국 탁상공론이다. 박정현 대덕구청장은 "탄소제로 역시 분권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박 구청장은 "정부와 지자체들이 2050년 탄소제로를 선언했지만 이 선언이 구호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며 "주민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잘 실천해갈 수 있도록 미호동에서부터 좋은 본보기를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