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말하는 산재예방 ⑤

틀에 갇힌 산업안전

2022-05-24 11:34:49 게재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

며칠 전 다녀온 사고현장 생각으로 잠에서 깼다. 오랜 일에서 비롯된 직업병인 듯하다. 경기 남양주 한 전원주택지의 통신전주 이설 요청에 따라 약 7m 높이 전주에 올라 무선통신 설비를 해체하던 작업자가 떨어져 사망했다.

사고를 목격한 주민은 "머리에서 다량의 출혈이 있었다"며 "고소작업차가 왔어야 했는데 밧줄로 전주에 몸을 묶고 위험하게 작업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말했다. 그 주민은 사고현장을 찾은 안전보건공단 고용노동부 시공업체 관계자를 싸잡아 나무랐다.

그 현장에 떨어져 있던 사망자의 안전모는 머리가 땅에 부딪치기 전에 이탈된 상태였다. 물론 안전모가 이 사고의 원인도, 보호구도 아니다. 하지만 머리가 지면에 닿는 순간에 머리에 씌워져 있었다면 사망을 막을 수도 있었다.

턱끈 없는 선진국의 안전모

2016년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출장 때 방문한 건설현장에서 제공한 안전모에는 턱끈이 없었다. 그들이 건넨 안전모는 내피가 후두부를 감싸서 이탈을 방지하는 구조였다.

지난 3일 경기 남양주 전원주택지의 통신전주 이설 작업 중 발생한 추락 사망사고 현장. 안전모와 밧줄 등이 널부러져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착용자의 불편 때문에 필요시에는 무용지물이어서 턱끈에 준하는 대체물을 허용하는 관련 기준(EN 397_2012+A1_2012)을 개정하면서 턱끈 없는 안전모가 개발돼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8년 12월 발생한 KTX 강릉선 탈선사고 뒤 국토교통부 장관이 TV에서 브리핑을 했다. 안전모 턱끈을 늘어뜨린 상태였다. 최근 동해안 산불 관련 인터뷰를 하던 전문가의 턱끈도 늘어진 상태였다.

추락사고 때 안전모가 이탈되지 않도록 턱끈을 조이면 물 한잔 마시기도, 대화도 불편하다. 게다가 작업자들이 턱끈을 충분히 조였는지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다수의 추락사고에서 안전모는 무용지물이다. 노동자 입장에서 땀에 절고 불편한 턱끈을 조여매라는 안전수칙은 추락시 안전모 탈락의 책임을 작업자에게 떠넘기는 기준으로 볼 수 있다.

문제해결의 장벽이 되는 인증기준

법은 상황 변화에 따른 개정이 법 제정 이상으로 중요하다. 안전모 턱끈의 경우 인증기준의 국제화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현재의 인증기준은 대안의 개발을 막는 장벽이다. 이런 개정이 필요한 기준들이 의외로 많다.

예를 들면 2016년 대전에서 발생한 비계 해체 작업시 추락 사망사고를 막을 수 있었던 안전난간 선행 비계의 경우, 일본에서는 일찍이 실용화됐다. 국내 기업에서도 연구·개발돼 인증을 신청했으나 묵은 인증기준 장벽에 막혀 인증에 5년 이상 걸렸다.

아파트 건설공사 갱폼(거푸집) 공법의 경우, 낙하물 방지망은 일정 구역 출입통제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준 준수를 위한 고소작업 시 추락 사망사고가 발생해도 그 기준이 바뀌지 않고 있다.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는 장비를 민간 안전보건 전문기관 설립 승인기준 때문에 구비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시스템안전의 석학 라스무센(Rasmussen)의 ACCIMAP(공동체의 상하, 수평 조직들의 사고 기여요인 지도) 관점으로는 정부의 기준관리 소홀을 관련 사고의 기여요인(Contributing Factor)으로 볼 수 있다.

중대재해에 대해 경영자의 책임을 묻는 것이 시대정신이라면, 그에 대한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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